ⓒReuters=Newsis2006년 4월2일 호주 시드니에서 웨스트파푸아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2월1일은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가 인정한 양심수 유삭 파카쥐(Yusak Pakage)와 필립 카르마(Filep Karma)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이 두 사람은 2004년 12월1일 자신의 조국 웨스트파푸아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10년과 15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복역 중이다. 1961년 12월1일은 웨스트파푸아가 독립을 선포한 날로서 웨스트파푸아 주민들은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기린다.

 ‘인도네시아는 웨스트파푸아 양심수인 유삭과 필립을 석방하라!’ 지난해 12월1일 한국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가 있었다. ‘웨스트파푸아’의 독립과 파푸아 양심수를 위해 한국의 국제연대시민단체 회원들이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올해 12월1일에 맞춰 시민단체는 두 번째 국제공동행동의 날을 준비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웨스트파푸아’를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파푸아뉴기니?’라고 되묻는다. ‘웨스트파푸아’는 파푸아뉴기니 서쪽에 있는 파푸아뉴기니만큼 큰 지역을 부르는 말이다. 이미 독립을 선포한 나라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인도네시아의 강제 병합에 의해 식민지로 남은 나라다.

웨스트파푸아는 세계에서 그린란드 다음으로 큰 섬인 뉴기니의 서쪽 절반을 차지한다. 5만 여 년 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멜라네시아인 후손이 ‘파푸안(papuan)’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곳이다. 당연히 인도네시아 사람들과는 민족이 다르다. 뉴기니 섬은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분할 점령으로 동서남북으로 쪼개졌고, 세계 2차대전 이후에는 지금처럼 동과 서로 나뉘었다. 현재 뉴기니 섬은 동쪽의 독립국가인 ‘파푸아뉴기니’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남아 있는 서쪽의 ‘웨스트파푸아’로 나뉘어 있다.

미국은 1962년 ‘뉴욕 협정’을 주도했는데 이 협정에 따르면 웨스트파푸아는 인도네시아의 6년 위임통치가 끝나는 1969년에 ‘독립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일이 제대로 풀렸다면 웨스트파푸아는 1969년에 독립해 지금쯤 당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웨스트파푸아 주민들은 1961년 의회를 설립하고, 그해 10월19일에 설립된 ‘파푸아 민족위원회’에서 국명·국가·국기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웨스트파푸아의 독립을 바라지 않았다. 1969년 독립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됐지만 이 국민투표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뽑은 친인도네시아 파푸아인들 오직 1022명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협박과 감시 등 강압적 분위기에 실시된 그날의 국민투표 결과는 인도네시아가 ‘합법적’으로 웨스트파푸아를 식민지로 점령할 수 있도록 만든 결정적 근거가 됐다.


인도네시아 통치 후 주민 10만명 넘게 살해돼

인도네시아는 웨스트파푸아의 천연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해당 지역을 군사화하고 자원을 수탈했다. 그 과정에서 자행된 강제 이주, 강제 노동을 통해 원주민 부족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체포·고문·강간·살인과 같은 온갖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웨스트파푸아는 석유·가스·구리·목재·금 같은 천연자원의 매장량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금과 구리의 매장량은 세계에서 3위 안에 든다.

웨스트파푸아는 네덜란드의 지배와 일본의 점령에 뒤이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자유와 독립 투쟁을 계속해왔다. 언젠가 만스렌 망운디라 불리는 신이 재림해 파푸아인들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전설에 바탕을 둔 ‘꼬레리 운동’부터 민족주의적 색채의 분리 독립 저항운동까지 다양하다. 특히 파푸아 해방운동((Free Papua Movement)은 인도네시아 식민 지배 이후부터 무력 저항을 계속하면서 저항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자원 개발과 이주 정책을 빌미로 웨스트파푸아 저항운동 지도자 살해 및 저항운동 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일삼았다. 심지어 국기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섬 주민 수백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1963년 인도네시아의 임시 통치 이후부터 최근까지 살해된 웨스트파푸아인의 수만 해도 10만명이 넘는다.
수하르토 군사정권이 물러난 이후 인도네시아는 웨스트파푸아에 일시적으로 유화정책을 썼다. 2001년에 웨스트파푸아 주민에게 특별자치를 인정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파푸아 자치의회가 인정받고 국기 게양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특별자치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2003년 9월 일방적으로 웨스트파푸아를 3개 주로 분할하겠다는 법을 시행하면서 무너졌다. 특별자치란 파푸아인들의 독립 의지와 저항을 희석시키려는 당근에 불과했던 것이다. 말이 합법이지 여전히 웨스트파푸아에서는 국기 게양이 ‘반역죄’로 처벌받는다. 
지난 10월18일 웨스트파푸아 수도인 자야푸라에서 변호사 사바르 이완깅(Sabar Iwanggin) 씨가 대테러 파견대 요원과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2006년 자야푸라에서 벌어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사태 당시 경찰의 무자비한 인권 침해를 폭로하고, 불공정한 재판에서 부당한 선고를 받은 22명의 파푸아인들을 변호한 변호인단 중 한 명이었다. 사바르 이완깅 씨는 현재 ‘선동죄’와 ‘대통령 모독죄’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당국에 구금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경찰이 그에게 뒤집어씌운  ‘대통령 모독’과 ‘선동죄’ 혐의는 지난 7월 수 천명의 파푸아 사람에게 발송된 ‘대통령 비방’ 내용이 담긴 문자를 사바르 이완깅이 작성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그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Reuters=Newsis2006년 9월4일 웨스트파푸아 콴키 라마 지역에서 인도네시아 경찰이 독립을 요구하는 원주민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
사바르 이완깅 씨의 체포는 특별자치 이후에도 계속되어온 인도네시아 정부의 파푸아 독립운동 인사들에 대한 탄압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지난 3월 웨스트파푸아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성직자 ‘베니 기아(Benny Giay)’ 씨가 한국 성공회대학의 인권평화센터에서 주최한 한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온 적 있었다. 베니 씨가 한국에 도착하던 날 배정된 숙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의 체류 일정 및 활동을 묻는 한국 형사였다. 국내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웨스트파푸아 주민들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거리에서는 인도네시아의 특별자치에 반대해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재실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파푸아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외의 연대단체들도 인도네시아 정부를 계속해서 압박하며 파푸아인의 진정한 자결권과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 

웨스트파푸아 국기인 ‘모닝 스타’-빈탕크조라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 별이 하나 그려져 있다. ‘삼파리’라고 불리는 샛별이다. 파푸아 사람들의 구전신화 ‘코레리 전설’에 따르면 이 별이 그려진 국기를 걸면 그들을 구원해줄 신 ‘만스렌’이 나타나 초자연적 도움을 준다고 한다. 12월1일 웨스트파푸아 주민들은 또다시 목숨을 걸고 이 샛별 국기를 거리 곳곳에 걸 것이다.

기자명 박의영 (국제연대시민단체 나와우리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