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매체는 조선일보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안중근 소설 〈불멸〉을 연재하고, 다양한 발굴 기사를 게재한다. 유묵전·마라톤·학술대회 등 다양한 사업을 공동 주최하거나 후원하기도 한다. 특히 ‘중국인·일본인도 안중근기념관 건립 성금 내놓는다’는 제목의 사설을 싣는 등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립 모금에 열을 올리고 있다. 10월20일에는 조선일보를 보고 2000만원을 기부했다는 할머니와 한 중소기업의 기부 소식을 큼지막하게 실었다. 조선일보는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한 안 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안 의사를 집중 조명하는 데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대학 교수는 “민족지인 양 안 의사를 내세우는 조선일보는 과거 친일 행적에 대한 사과를 먼저 해야 한다. 조선일보는 독립운동가들을 범죄자로 비하한 예가 수없이 많다”라고 말했다.

1920년 일제강점기에 창간한 조선일보는 독립운동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1932년 1월8일 발생한 이봉창 의사 폭탄투척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다. “천황 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에… 수류탄과 같은 물건을 던진 자가 있어 궁내대신 마차의 좌후부 바퀴 부근에 떨어지어 차체 바닥에 엄지손가락만한 손상 두셋을 나게 하였으나 천황의 마차에는 이상이 없어… 범인은 조선 경성생 이봉창(32)….” 민족지를 자처하는 조선일보는 의거를 ‘불경’으로 단정지었다. 중국신보가 이 사건을 항일투쟁 사건으로 규정한 것과 대비된다. 블라디보스토크 방송은 “일왕의 위치와 신성성에 대해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했다”라고 보도했다.

지난 10월20일자 조선일보. 안중근 기사가 1면과 11면, 22면에 실렸다.

조선일보는 윤봉길·김상옥·나석주 등 일제에 체포된 애국지사에게는 ‘범인’, 무장 항일 세력에게는 ‘비적’(匪賊)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의 불행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라고 보도했다. 1936년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에 대해서는 “사회 개조를 목적으로 한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인 만큼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라고 썼다.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보도금지 조처를 충실히 지켜 수 개월 지난 후에 보도했다.

안중근 이슈 선점해 친일 행위 물타기

1939년 1월1일에는 일왕 부부 사진을 머리기사로 게재하고,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에는 충성서약 사설을 썼다. 사설에는 황공도 모자라 ‘성황성공’, 경하도 부족해 ‘동경동하’라 하고, 충성도 모자라 ‘극충극성’이라고 했다.

그 같은 친일 행각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는 1940년 8월11일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폐간된다.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씨는 폐간사에 이렇게 적었다.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려분려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일제시대에 친일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친일파의 논리다. 안 의사의 정신에도 위배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 언론이 있었다. 안 의사를 ‘흉도’로 매도한 황성신문, 대한민보와 달리 대한매일신보는 ‘안중근씨 공판’ ‘안중근 소식’ ‘안씨의 기서’ 같은 제목으로 안 의사 소식을 전했다. 1910년 3월30일 기사에서는 국내 언론 사상 처음으로 ‘의사’라는 호칭을 썼다. 대한매일신보는 ‘의병’이라는 단어도 계속 사용했다. 윤원일 사무총장은 “조선일보가 안중근 이슈를 선점해 친일행위를 물타기 하고 있다. 친일 신문 조선일보가 자신을 이용하는 것을 안다면 안 의사가 땅 속에서 통곡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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