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제일은행은 대출채권 유동화 안내 통지서 한 장을 달랑 보낸 뒤 고객의 동의를 받았다고 간주해 고객의 대출채권을 팔아넘기고 있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이라면, 은행에서 발송한 우편물을 꼼꼼하게 챙겨 봐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채권자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은지씨(37·학원 운영)는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던 SC제일은행으로부터 최근 낯선 등기 우편물 한 통을 받았다. ‘대출채권 유동화 안내 통지서’였다. 처음에는 잘 모르는 내용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통에 던질 뻔했다. 공부 삼아 금융 지식이 풍부한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우편물의 내용을 이해했다. 대출채권을 유동화한다는 것이 은행이 갖고 있던 고객의 대출채권을 다른 회사에 양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원리금을 연체하지 않고 꼬박꼬박 잘 냈는데도 대출채권을 다른 회사에 넘기겠다는 은행의 태도도 못마땅했지만, 대출채권을 양도한다고 일방적으로 통지하는 태도가 몹시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성은지씨는 은행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은행측은 ‘대출채권 유동화는 선진 경영기법의 일환으로 다른 은행에서도 모두 하는 것’이라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거듭 항의하자 은행측은 ‘성은지씨의 대출채권만은 유동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성은지씨는 “우리 국민 가운데 대출채권 유동화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은행이 보낸 통지서를 받아도 그냥 휴지통으로 넣어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녀 말대로 채무자가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으면 은행은 채무자가 동의했다고 간주하고, 대출채권을 다른 회사에 팔아넘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출채권자가 바뀌는 것이다.

SC제일은행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출채권 유동화’는 미국과 같은 금융 선진국에서 흔히 쓰는 금융기법이다(상자 기사 참조). 국내 은행 가운데서는 SC제일은행이 유일하게 실시하고 있다. 은행이 대출채권을 유동화한다고 해서 고객에게 미치는 직접 피해는 크지 않다. 대출 조건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성수 건국대 교수(부동산학과)는 “대출채권이 유동화된다고 해도 채무자가 입는 피해는 별로 없다. 채권자가 바뀐 뒤에도 대출 채무자는 처음 계약대로 대출 이자와 원금을 갚아나가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대출채권을 유동화한다고 해서 채무자인 고객이 얻는 이익도 없다. 오히려 채무자는 채권자가 달라짐으로 해서 자신의 신용정보가 은행이 아닌 또 다른 회사로 넘어가는 것에 심리적 불안을 감수해야 한다. 또 은행이 채권자일 때는 기한이나 금리를 협상해볼 여지가 있지만, 채권자가 바뀐 뒤에는 대출 약정에 따라 만기까지 끌고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고객에게 주는 ‘보너스’ 혜택도 없이 은행의 필요에 의해 도입한 기법인 만큼 은행이 고객의 대출채권을 유동화하려면 고객에게 충분히 설명을 해주고 동의를 받는 것이 상식이다. 국내 민법에서도 채무자의 동의 없이는 채권을 양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SC제일은행은 채무자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무리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고객에게 충분한 설명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의를 구하는 방식도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SC제일은행은 고객이 대출받을 당시 대출채권 유동화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또 동의를 구할 때도 10일 이내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일방적 통지 방식을 취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장기 주택대출이 늘어나면서 국민은행이나 농협 같은 다른 은행도 대출채권 유동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고객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번거로워 도입을 포기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대출채권을 유동화하려면 고객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수많은 고객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포기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SC제일은행측은 현행 방식에 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SC제일은행 관계자는 “대출 시점에서는 그 채권을 유동화할지 안 할지 모르기 때문에 굳이 대출채권 유동화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또 동의를 구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아닌가. 대출채권 유동화에 동의해달라고 우편물을 보내면 몇 명이나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런 방식으로는 일하기가 어렵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SC제일은행은 2004년 첫 발행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일곱 차례나 발행했지만 대다수 고객이 양해해주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은행측의 주장과 달리 성은지씨처럼 SC제일은행의 일방적 통지 방식에 항의하는 채무자들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금융감독원 자산유동화업무팀 박삼철 팀장은 “SC제일은행의 일방적인 통지 방식에 반발하는 고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행법으로는 딱히 업무개선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사안이어서 행정지도만 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소비자가 알아서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기자명 안은주 기자 다른기사 보기 anj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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