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을 벤치마킹하겠다고 해서 주목된다. 지난주 남북 총리회담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던 김영일 북한 내각 총리도 북한 경제의 활로를 찾기 위해 베트남을 다녀왔다. 북한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눈을 돌린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의 경우 1975년 남북 통일 이후 중앙집권 계획경제를 추진했지만, 경제체제가 이질적이어서 경제 재건과 공업화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구소련의 원조 중단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된 베트남은 1986년 12월 6차 당 대회에서 웬반린 서기장이 등장한 이후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한 경제자유화에 주력해 왔다.

통일 이후 호찌민 시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던 웬반린 서기장은 베트남 전쟁 중 남부 베트남에서 당의 남부위원회 서기로 활동한 개혁파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러나 1989년 후반 소련과 동유럽 변혁이 확산되자 당의 노선이 강경한 방향으로 선회하고, 1990년 3월 비공개로 진행된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는 예상을 뒤엎고, 웬반린의 후계자로 지목되어왔던 개혁파 짠수안박을 정치국에서 축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상존했으나, 베트남은 집단적 지도체제를 통한 정치 안정 추구, 개혁 이후 네 번에 걸친 순조로운 세대교체 및 정치권력 이양을 통해 정치체제 안정화에 성공했다. 북한의 경우 베트남과는 정치 리더십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당의 사회 통제력을 전제로 정치 안정과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베트남 모델의 적용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히 도이모이 노선을 채택한 이후 남부 출신의 개혁파가 총리를 역임하면서 개혁 선봉에 섰지만, 개혁 과정 내내 당과 군부가 정치 실세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베트남은 정부의 행정 기능 강화를 통해 당의 사회 통제력을 점차 비공식화하고, 실질 개혁 추진력을 정부에 집중시켜왔는데, 이는 북한의 향후 진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진국 지원받으려 '급진 조처' 추진

체제 전환은 빅뱅식의 동구 모델, 점진주의에 입각한 중국 모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베트남은 중국식 개혁 모델에 따라 정치보다는 경제 개혁에 중점을 두면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이행 전략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베트남 개혁의 초기 조건을 살펴보면, 중국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코메콘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구소련 및 동유럽과의 교역 관계 단절로 인해 큰 경제 충격을 받았다. 구소련의 원조 중단으로 거시경제 불안정성이 심화되자 재정․금융 개혁이 불가피해 지고, 전면 가격 자유화 조처를 단행했다. 베트남은 1987년 각의 217호 결정에 의하여 정부 통제 품목 이외에는 사실상 시장가격화했다. 1989년 말까지 전력·수도·교통·통신·철강·시멘트 이외의 품목 가격은 모두 자유화함으로써 이중가격제를 사실상 폐지했다. 중국이 1978년 경제개혁을 시작한 이래 1990년대 초반까지 점진적으로 가격자유화를 추진했던 것에 비하면 매우 급진 조처라고 할 수 있다.

급진 개혁이 불가피했던 또 다른 이유는 중국과 달리 경제 규모가 작고, 대외 의존도가 높아 IMF와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금융기관과 주요 서방 선진국의 지원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경제개혁 과정에서, 농업 부문의 제도개혁과 혁신을 통해 향진 기업에 의한 농촌공업화를 실현했다. 이것이 외국 기업의 직접투자와 연계되면서 노동집약적 수출 생산이 급증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농업의 과잉 노동력을 흡수할 공업기반이 취약하고 자체 재원조달이 어려웠다. 중국식의 내향 발전보다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노력하고, IMF와 세계은행 등 국제 금융기관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엄격한 지원 조건을 준수하는 등 외국의 지원에 의존한 개혁 체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도 미국 주도 경제 제재에 '혼쭐'

현재 북한이 처한 현실은 중국보다는 베트남의 초기 조건과 매우 유사하다. 베트남의 체제 전환 과정이 북한에 주는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개혁 초기 단계에서 북한은 체제 안정을 우선 과제로 하고, 위로부터 개혁을 통해 점진적으로 개혁의 순서를 고려하면서 대외 개방과 경제개혁을 진전해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개혁체제를 전면적으로 수용한다 하더라도 베트남의 사례에서 보듯, 북한도 가격자유화와 거시경제 안정화에 역점을 두고, 소유제 개혁과 국영기업 민영화는 점진적으로 추진해나가리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은 공업국가형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개방 정책의 양태가 베트남과는 다소 다를 수 있다. 국영 공업 부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 개혁이 확대될수록 국영기업 민영화 문제가 정치·경제 갈등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개방과 개혁을 분리하려는 유인이 지속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개혁의 진로가 매우 복잡해질 수 있다.

북한이 베트남을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대미 관계 개선 과정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 초기부터 베트남은 적극 개방 노선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의 경제 제재(Embargo)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캄보디아 침공(1978)으로 인한 국제 고립과 중․월전쟁(1979) 이후 지속되어온 전비 부담, 구소련의 지원 중단 등이 복합 작용하면서 극도의 경제 불안정을 겪어야 했다. 베트남이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제재 조처가 지속되면서 국제 금융기관 및 서방 주요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북한의 현재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1989년 베트남 군의 캄보디아 철수를 계기로 주요 서방 선진국의 베트남 진출이 본격화했다. 미국은 1990년 8월부터 캄보디아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인도차이나 평화 정착과 실종 미군 문제(MIA) 해결을 위해 베트남과 대화를 재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4월 미국 국무부 솔로몬 아․태담당 차관보가 베트남에 제안한 국교정상화를 위한 이행 절차(Road Map) 4단계안은 미․월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러한 미국의 접근법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이후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명확히 보여준다. 캄보디아 평화 정착 실현 이후에도 베트남이 미국과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국제 금융기관이 베트남에 융자를 재개하는 등 부분적으로 경제제재 조처를 해제한 것은 1993년 7월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이 개혁노선을 추진한 지 거의 10년 만인 1995년 8월 미국과 베트남이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양국 간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최혜국 대우(MFN)를 부여하는 무역협정 체결은 계속 지연됐다. 미국은 통상법 402조 잭슨․배닉 개정조항(Jackson-Vanik amendment)에 의해 베트남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금지해왔다. 이는 베트남을 미국 시장에 대한 우회 수출기지로서 활용하고자 했던 외국인 직접 투자자에게는 가장 큰 장애 요인이었다. 당시 최혜국 대우를 받지 못한 나라는 베트남을 포함해 북한·아프가니스탄·세르비아·쿠바·라오스 등 6개국이었다. 그러던 중 1998년 3월 베트남이 잭슨․배닉 개정조항에서 면제됨으로써 미국의 해외민간투자공사(OPIC)와 수출입은행, 민간기업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됐다.

1999년 7월 미국과 베트남은 무역협정에 기본 합의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국교 정상화 이후 9차례나 교섭한 끝에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나 공식 합의는미국 측이 시장 개방을 위해서는 경제개혁을 확대해야한다고 요구한 데 대해 베트남 측이 반발하면서 계속 지연됐다. 그러던 중 1999년 연말 미국 측이 중국의 WTO 가입을 승인함으로써 미․중 관계의 개선이 가시화되고, 대내적으로 동아시아 경제 위기로 인한 경기 침체가 심화되자 베트남 측이 대미 강경 자세를 누그러 뜨리면서 2000년 7월13일 극적으로 공식 합의에 도달하게 됐다. 2001년 9월 초 미국 하원에서 무역협정 체결을 승인하면서 410대1의 압도적 다수로 베트남에 대한 인권법안을 통과시켰으나, 베트남 측의 반발로 미국 상원 비준 과정에서 최종적으로는 인권법안 처리가 보류되기도 했다. 2001년 11월 미국과의 무역협정이 최종 비준되고, 조건부이지만 무역 관계가 정상화(NTR)되면서 최혜국 대우(Most Favoured Nation: MFN)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2006년 11월7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WTO 총회에서 베트남은 150번째 회원국으로 승인되었다. 개혁․개방 정책이 2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야 WTO 가입을 실현한 베트남 경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오랜 기간의 협상과 우여곡절 끝에 올해 초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된다.

북한 체제 전환, 남북 경협 매개로 이루어져야

시장경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베트남은 국내 재원이 부족해 대부분의 개발자금을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경제개혁 추진과 경제난 해소를 위해서도 비용 조달 문제가 조만간 주요 현안으로 떠오를 것이다.

베트남 모델에서 알 수 있듯이 원활한 체제 전환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안정적 지원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선 북한은 경제난을 풀기 위한 해법으로 내핍 경제에서 탈피해 시장경제 요소에 대한 적극 수용 의지와 실천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핵문제 및 북․미 관계 개선과 함께 서방 자본과 국제금융 자본이 들어올 수 있도록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IMF나 세계은행 따위 개혁 프로그램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을 우선 고려해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어떠한 경우라도 남북 경협을 매개로 한국 주도로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 전환은 이행, 개발, 남북 통합이라는 복잡한 연계 속에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국제협력 모델 또한 안정적 체제를 구축하기에는 많은 제약 요인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으로서도 남북 경협 초기부터 재원 조달의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서는 경협자금 수요가 한국의 부담 능력을 크게 초과하는 상황이므로 대규모 해외 자금을 유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현 단계는 베트남이 전면 경제개혁에 들어가기 직전 추진했던 신경제 정책과 그에 뒤이은 가격, 임금, 화폐개혁 단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2002년 도입한 7·1 경제관리개선 조처는 계획경제 체제를 온존하며 부분적으로 자유화 조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부분 자유화 조처는 오히려 거시경제 불안정성을 증폭해 전면 경제개혁이 불가피해진다. 따라서 북한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중장기 시장경제화 정책이 추진되어야 하고, 대규모 자금 지원을 위한 재원 방안 마련에 한국 정부가 적극 노력할 시점이다.

기자명 권율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동서남아팀장)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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