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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외환위기 10주년을 맞은 한국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가 ‘삼성 공화국’이라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사건은 김용철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갑작스러운 폭로로 시작되었지만, 이미 학계·시민사회단체 내에서는 “환란과 그에 따른 ‘신자유주의 개혁’의 한 귀결로 삼성 공화국이 탄생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어왔기 때문이다.

10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삼성 역시 ‘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몰린 재벌 대기업 중 하나였다. 특히 1995년 3월 이건희 회장의 각별한 애착 속에 탄생한 삼성자동차는 기아차·대우차의 몰락과 은행의 대규모 부실을 불러온 과잉 중복 투자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그랬던 삼성이 10년 후 ‘정부 위의 정부’라는 소리까지 듣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김상조 한성대 교수(무역학과·경제개혁연대 소장)는 현재의 삼성을 ‘한국 사회의 혁신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의 핵심이자 신자유주의 재편의 최대 수혜자’로 규정한다.

외환위기 주범들, 오히려 경제력 확대

물론 삼성만 수혜를 입은 것은 아니다. 파산한 재벌을 제외한, 현대·LG·SK 등 상위 거대 재벌 대부분이 ‘강요된 개혁’을 하나하나 이행하면서 나름의 내부 합리화 노력과 부실기업(계열사) 정리·인수로 경제력을 확대해왔다. 김상조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범삼성(삼성·신세계·CJ·한솔·중앙일보)을 포함한 4대 재벌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과 비교해 훨씬 커졌다. 2005년 기준으로 GDP(국내총생산) 대비 매출액 비중은 15.07% 포인트(34.14→49.21%) 증가했으며, 총자산 비중도 16.28% 포인트(27.17→43.45%) 상승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양극화도 점점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제조업 부문 영업이익률 격차는 0.81% 포인트(1990년)에서 5.32% 포인트(2004년)로 크게 벌어졌다. 5대 재벌과 그 외 기업 간의 수익성 차이도 마찬가지다. 매출영업이익률 상대비를 보면 1.0배(1981∼1990년), 1.4배(1991∼1996년)에서 2.2배(2002∼2004년)로 격차가 더 커졌다. 조영철 국회 산업예산분석팀장은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소수 거대기업의 독과점화가 심화되고 이를 바탕으로 이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 한 요인이다”라고 분석한다.

ⓒ연합뉴스2006년 2월 삼성그룹 수뇌부가 ‘X파일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일부 재벌에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충격’으로 다가왔던 외환위기는 이렇게 곧 ‘축복’이 되었다. 심지어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사회는 확실히 ‘기업 사회’로 변했다”라는 인식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이라는 저서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초일류, 일등 등 경쟁을 부추기는 용어를 매일 아침 신문 광고에서 확인할 수 있고, CEO 대통령, CEO 총장, CEO 장관, CEO 시장이라는 말도 유행이다. CEO는 우리 사회의 이상적 리더 모델이 되었다. ‘경쟁력’ ‘퇴출’ ‘유연성’ ‘구조조정’ ‘도덕적 해이’ ‘투명성’ ‘고객 만족’ 등 기업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이제 모든 조직에서 사용하는 보편 용어가 되었다.”

삼성은 기업 사회를 주도하는 여러 재벌 가운데 단연 선두에 서 있는 기업이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보여주고 있는 눈부신 성장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5대 재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삼성은 5대 재벌 일반 자산의 50.8%, 자본 총액의 45.9%, 매출액의 39.5%, 당기순이익의 46.2%를 차지(2005년 기준)하는 ‘슈퍼 재벌’로 재탄생했다.

막강한 경제력은 사회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참여연대는 지난 2005년 8월 “대한민국은 시민이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이지만 실제로는 삼성이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경제 영역은 물론 정치·사회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라며 ‘삼성 공화국’을 하나의 실체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선출된 권력' 좌지우지

그렇다면 일개 기업이 공화국을 집어삼키고 있는 동안 이를 감시·견제해야 할 기구 또는 세력들은 과연 무엇을 했던 것일까. 물론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서 드러난 ‘로비’와 ‘유착’ 두 단어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추적해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음이 확인된다.

정태인 민주노동당 한·미FTA저지운동본부장은 우선 이건희 회장의 1995년 4월 ‘베이징 발언’을 주목한다. 이 회장은 당시 장쩌민 중국 주석을 면담한 뒤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한국은 21세기에 일류 국가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1992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대선 출마가 있긴 했지만, 한 재벌 대기업의 수장이 정부와 국회·정당을 향해 노골적 불만을 쏟아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 본부장은 “이 회장의 발언은 재벌의 힘이 정치권력보다 더 강해지고 있음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라고 말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시장주의가 ‘공공성’에 “한판 붙어보자”라고 도전장을 내민 것일 수도 있었다. 정 본부장은 “시장 논리의 지배는 김영삼 정부 시대에 하나하나 관철되기 시작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시장 논리가 내면화되었고, 자연히 공기업·공교육·공공 주택·부동산 모든 영역에서 공공성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라고 회고한다.

ⓒ연합뉴스2003년 여야는 정치개혁안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사실 정부와 정치권 하면 그 수준 이하의 행태 때문에 ‘3류’ ‘4류’라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국민 절대다수의 선택(투표 행위)에 따라 운영 주체가 결정되고, 국민 지지율에 일상적으로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선출된 권력체’는 미우나 고우나 정부와 국회·정당밖에 없다. 그 태생에서부터 공공성의 사명을 안고 있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괜히 ‘공무원(公務員)’이 아니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관료 집단과 정치권은 환란을 일으킨 주범이자 부패·무능·비효율·낭비의 대명사로 낙인 찍히면서 급속하게 시장 논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를 내세운 김대중 정부는 경쟁 논리를 도입하면서 구조조정, 목표관리제 등 기업의 경영 시스템을 행정조직에 대거 적용했고, 대기업을 비롯한 민간 교육기관에 대한 공무원 위탁 교육도 활성화했다.

퇴직 공무원들의 민간 기업 재취업 러시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지난 2003년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8년부터 5년 사이에 퇴직한 4급 이상 재정경제부 공무원 53명 가운데 민간 기업에 취업한 경우는 19명(35.8%)에 이르렀다. 이는 외환위기 이전에는 퇴직자의 90% 이상이 정부투자 기관으로 갔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높아진 수치였다. 특히 삼성은 19명 중 4명을 영입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같은 ‘개혁’의 결과는 자명했다. 이 분야를 연구한 박상훈 박사(정치학·출판사 〈후마니타스〉 대표)는 “관료와 기업의 자유로운 결탁이 가능해짐으로써 기업이 공공 영역에서 쉽게 권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지적한다. 선출되지 않았고, 보이지도 않는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길이 마침내 활짝 열린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지난 2005년 5월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언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정치 개혁의 결과 삼성 공화국 탄생?

국회와 정당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고비용·저효율 정치 구조 청산’ ‘생산적 국회’ ‘정치 경쟁력 제고’ 담론뿐만 아니라 기업 구조조정 논리를 그대로 이입한 ‘국회의원 정원 축소’ ‘지구당 폐지’ 같은 요구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본격 제기되기 시작했다. 여론 역시 “만날 정치 공방만 벌이다 IMF 구조조정을 불러왔다”라며 정치권의 고통 분담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었다.

정치 개혁의 핵심은 이제 ‘어떻게 하면 소외되는 사람 없이 국민의 의사를 잘 대변하느냐’가 아니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더 돈을 적게 들이고 더 세련된 정책을 많이 생산하느냐’가 목표였다. 박상훈 박사는 이러한 방향의 개혁이 “부패와 비효율을 줄인다며 정치 자체를 줄이고, 결국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평가한다.

ⓒ연합뉴스1998년 8월 현대자동차 노조(위)는 회사 측의 정리해고 방침에 반발해 총파업을 벌였다.
국민을 대표해 사회 곳곳을 감시하는 헌법기관의 수 자체가 줄어들고(국회의원 정원 축소), 정치 또는 정치인이 일반 국민을 일상적으로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조직 기반이 사라졌을 때(지구당 폐지)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집단은 몇 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가 국회의원 수 30% 축소와 지구당 폐지를 골자로 한 정치개혁안을 집권 국민회의·자민련 정치구조개혁위원회에 제출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실제 훗날 정치권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정수를 299명에서 273명으로 줄였으며, 2004년 총선 전에는 지구당을 폐지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참고로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인구 17만2000명당 1명 꼴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인 8만5000명당 1명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삼성 공화국’은 이러한 정당 정치의 축소와 ‘당정 분리’ ‘대중 직접 동원 체제’에 기반한 대통령 통치 스타일의 결합이 가져온 한 결과이기도 했다. 박상훈 박사는 “정당의 매개 없이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을 때 재벌의 정책 로비 기능은 극대화할 수밖에 없고, 전문가 집단의 자문과 정책 ‘작성’ 기능에 대한 의존 역시 커진다”라며 노무현 정부 시기 삼성과의 정치 연계가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노동계, 그때도 지금도 최대 피해자

외환위기 직후, 폭주하는 시장 논리에 조금이나마 제동을 걸 수 있는 유력한 집단 중 하나는 바로 노동계였다. 무엇보다 재벌, 정부, 정치권 등과 달리 ‘책임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홍주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노동계는 1996∼1997년 노동법 개악 반대 총파업이 국민 지지 속에 진행된 데다, 연쇄 도산과 구조조정으로 ‘피해자’라는 여론이 강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노동계의 영향력이 당시보다 커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현장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은 후 팽배해진 “노조도 못 믿는다. 있을 때 무조건 많이 벌자”라는 조합원들의 정서에 발목 잡혀 별다른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매년 꾸준히 하락(1996년 13.3%→2005년 10.3%)하고 있으며, 한 조사 결과 노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역시 10년 전에 비해 큰 폭(31.9%→10.6%)으로 떨어졌다.

홍주환 연구위원은 “1998년 2월 노사정 대타협 국면이 노동계로서는 매우 중요한 기로였다”라고 말한다. 당시 민주노총은 정리해고, 공무원·교원 노조 합법화 등이 포함된 대타협안을 수용했으나 곧바로 내부 대의원대회를 통해 부결과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게 된다.

홍 연구위원은 “당시 민주노총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노사정위원회에 계속 참여하면서 재계를 압박하고 사회 운영에 개입해나갔더라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노사정위원회는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 실질적인 사회 협약 기구로서 제대로 가동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강력한 투쟁에 나섰던 민주노총 역시 그후 1996∼1997년 총파업 때만큼의 실질적이고 대중적인 파업을 단 한 차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때 민주노총의 선택이 달랐다면 여전히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고 있는 삼성의 운명은 어떠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기자명 고동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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