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복판에는 ‘광장’이 세 개 있다. 시청 앞 서울광장과 청계광장 그리고 얼마 전에 개장한 광화문광장. 서울시 전체 면적에 비해 꽤 수가 많은 데다가, 모두 반경 1km 안에 오밀조밀 모여 있다. 광장에는 잔디가 깔려 있거나 분수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거나 흔하고 소박한 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다. ‘광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원에 가까운 형상을 한 셈이다. 난 그곳에 ‘광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영 못마땅하다.

우리에게 광장이란 어떤 용도로도 변신 가능한 탁 트인 공간, 누구라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어떤 모임이나 활동도 가능한, 그래서 때로는 비워져 있고 또 때로는 물샐 틈 없이 채워지기도 하는 그런 공간이 아니던가. 걸을 때마다 누군가의 어깨와 부딪치거나 앉을 자리도 옹색한, 마음 놓고 걷거나 앉아 쉬는 것조차 불편한 길을 광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 된다면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에는 광장의 사전적 정의도 바뀔지 모르겠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조금 큰 공원으로, 시민들의 정치적 집회를 원천봉쇄하고 전시행정을 광고할 의도로 조성된, 공적 자금이 다량 투여된 공간’이라는 식으로.
 

‘광장’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물적 공간을 제거해버린 이 정권의 문화정책은 ‘스크린 정책’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 여기서 말하는 스크린(Screen)이란 영상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볼 수 없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유형·무형의 가리개를 의미한다. 광장이라는 이름의 공원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요구를, 역사를 묵살하는 스크린이다. 평화롭고 한가한 도심 속의 녹색 공간, 문화 공간이라는 이름의 스크린. 이곳에서는 아무도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없다. 관청에서 허락한 것만 해야 하고 관청에서 제공한 편의 시설과 프로그램만 수동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산성을 쌓고 차벽을 둘러치고 할 때부터 이 정권은 ‘스크린’ 사용의 대가다운 풍모를 일관되게 보여온 셈이다.

‘스펙터클’ 이미지와 함께 모든 현실 ‘스캔들’화하기!
 

스크린 말고도 현 정권은 문화 정책에서 두 가지 ‘S’를 더 활용한다. 스펙터클(Spectacle)과 스캔들(Scandal). 이 두 가지 정책에는 미디어 자본의 조력이 무엇보다도 절실한데, 그것은 단순히 정권의 정책을 선전하거나 옹호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미디어의 세련된 기술은 현실의 비루함 혹은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돌린다. 끊임없이 화려하고 충격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한편 속도감 있게 신상품을 소개하고 유행을 선도한다. 쾌적한 주거 공간, 세련된 문화 생활, 고가의 상품들, 잘생긴 용모와 신체에 대한 동경은 화폐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며 사람들을 몰아친다. 부자가 되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용산 참사나 이주 노동자들의 고통, 거리의 노숙인과 성매매 혹은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이야기는 가십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스펙터클한 이미지와 함께 모든 현실을 스캔들로 만드는 저들의 능력!

이쯤에서 이 정권의 3S 문화정책은 자연스럽게 제5공화국 시절의 3S와 공명한다.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정책과는 별개로 눈 밝은 시민들이 지각했던 5공 시절 문화 정책의 핵심은 스크린(Screen)·섹스(Sex)·스포츠(Sport)였고, 그 목적은 정치적 현실로부터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데 있었다. 지금 우린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의 문화적 지배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이 여러 ‘S’들이 지시하는 것은 사실 하나, 즉 ‘바보(Stupid) 되기’이다. 어느 시대나 문화를 통한 지배 정책의 최종심급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자명 권용선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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