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공식 후보로 확정된 이후, 이명박 후보(위 가운데)는 경찰과 사설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여의도는 여의도공원을 중심으로 동여의도와 서여의도로 나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증권거래소·금융감독원을 비롯해 증권사들이 몰려 있는 동여의도가 ‘돈’과 관련이 많다면, 국회와 각 정당 당사 대선 후보 캠프가 몰려 있는 서여의도는 ‘권력’과 밀접하다.

서여의도 중에서도 의사당로 북쪽, 한국산업은행 뒤편, 렉싱턴 호텔과 국민은행 사이의 서북 지역이 요즘 권력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중·대형 아파트 단지 정도 규모의 이 지역에 이명박 후보 캠프를 비롯해 10여 명의 대선후보 캠프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 새 권력을 잉태하는 ‘권력의 자궁’이 된 이곳의 24시간 풍경을 대선을 1백여 일 앞둔 9월11일 살펴보았다.

오전 7시16분, 국민은행 앞

문국현 캠프 인터넷 담당인 김갑수씨가 아침 회의를 위해 이른 출근을 하고 있다. 출근길에 노사모 시절과 열린우리당 시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마주치지만 서로 애써 외면한다. 그저 상대방이 들어가는 빌딩을 보면서 ‘어느 캠프에서 일하는구나’라고 짐작할 뿐이다.

김씨의 경우 노무현에서 정동영으로, 다시 문국현으로 주군을 바꿨지만 이 정도는 범여권에서 흉이 아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격언은 범여권에서 ‘영원한 보스도, 영원한 심복도 없다’로 바뀌었다. 새로운 주군을 찾은 그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김근태 전 의장을 모셨다가 다른 캠프에 합류하지 않고 중립 지대에 남아 있는 이인영 의원은 예비경선 직후 심정을 묻는 기자에게 “씨 없는 수박이 된 기분이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오전 9시2분, 손학규 캠프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후보의 수행비서인 김용훈씨가 손 후보의 일정을 챙기고 있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손 후보를 수행한 그는 함께 보내는 시간과 물리적인 거리로 보았을 때 최측근이다. 상황 파악이 빨라 ‘눈치가 김영삼’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수행하는 중간에 여자친구와 번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김씨를 비롯해 손 후보에게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캠프에 합류한 ‘신세대 가신 4인방’이 있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던, 손 후보의 정치적 동지였던 김성식 전 경기도 부지사나 박종희 비서실장이 한나라당을 탈당하자마자 떨어져나간 것과 달리 이들 4인방은 계속 손 후보와 함께하고 있다.

오전 10시15분, 한명숙 캠프

ⓒ시사IN 윤무영손학규 후보 사무실 직원이 손 후보 사진을 걸고 있다
백원우 의원이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다. 그는 일명 ‘5분 대기조’다. 한명숙 후보를 수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가 수행하는 국회의원 없이 다니면 세가 약해 보여서 의원들이 돌아가며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경선 기간에 개인 약속은 전혀 못 잡고 있다. 정기국회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지역구도 가봐야 하는데…”라고 푸념했다.

오전 11시38분, 권영길 캠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캠프의 공보담당 채승기씨가 보도자료를 고치며 고심하고 있다. 애초 결선투표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짰던 일정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겐 잃어버린 1주일이다. 1백만 민중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계획했는데, 일정이 완전히 무너졌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같은 시각 심상정 후보 캠프 공보담당 이지안씨는 신이 나서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심바람’이 결선까지 불어서 이변을 낳을 것이라며 이번 대선은 이명박-문국현-심상정 경제 후보 3인방의 각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이틀 전 경선 발표 직전 기자의 전화에 “그냥 오지 말고 집에서 중계로 보세요. 서울 투표율이 낮아서 기대를 접었어요”라고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낮 12시25분, 설렁탕집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선 설렁탕집에서 한나라당 박재완 의원이 기자에게 수인사를 했다. 그의 앞에는 뜻밖에도 강재섭 대표가 앉아 있었다. 제1야당 당수인 것에 비추면 일행이 너무나 단출해 보였다. 비서실장인 박재완 의원과 수행원 한 명뿐이었다. 어렵게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전 대표 회동까지 성사시켰지만 그는 권력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서 있었다. 당 관계자들은 앞으로 이재오 최고위원과 박근혜 전 대표의 당권 싸움이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오후 1시30분, 거리

서여의도 거리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다. 10여 명의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이 후보는 거리의 시민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절반 정도는 호의적이었지만 절반 정도는 적대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서여의도에는 범여권 당직자들도 많다. 이 후보가 왜 여의도 후보 사무실이 아닌 종로의 안국빌딩에 주로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후보에게 〈시사IN〉 인터뷰를 부탁하기 위해 다가가는데 경호원들이 막았다. 세 번의 저지를 받고서야 겨우 명함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 후보가 요란한 행차를 하는 동안 길 건너편에는 또 한 명의 예비 대통령이 서 있었다. ‘제17대 대통령 최용석’이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언론은 전혀 주목하고 있지 않지만 1백여 명의 일반인 후보가 대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한 풀뿌리 시민단체는 대선 후보로 자전거를 내세울지 지렁이를 내세울지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퍼포먼스 아티스트 김윤환씨는 이날 저녁 대학로에서 대선 출정식 파티를 열고 ‘말레이시아 순방’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후 3시20분, 대하빌딩 엘리베이터

대선 캠프가 몰려 있는 서여의도의 특성은 보안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가만히 있어도 남의 말이 들리는 엘리베이터가 취약 지대이다. 기자도 본의 아니게 엘리베이터에서 ‘여의지앵’들의 수다를 엿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통합민주신당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하빌딩에 있는 정동영·이해찬 캠프를 방문해 눈도장을 찍고 손학규 캠프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이들 사이에 잠시 논쟁이 붙었다. 한명숙·유시민 캠프에 갈지 말지에 대한 것이었다. 금세 결론이 났다. “일단 가보자.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오후 4시48분, 용산빌딩 1층 커피숍

한나라당 대선준비팀 소속인 서지영씨가 용산빌딩 1층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일명 ‘섀도-블루 하우스’라고 불리는 대선준비팀에 발탁된 그는 다른 당직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서씨는 그동안 당 검증위원회와 경선관리위원회에서 일했다. 그 시절을 그는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시절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서씨와 커피 전문점을 나서는데 배낭을 멘 김성철씨가 나타났다. 전여옥 의원 보좌관인 그는 대선준비팀의 사이버팀에 배속받았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그는 회사 선배였던 진성호씨와 함께 인터넷을 맡게 되었다. 전 의원이 계속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고 있었다면 아마 그는 지금쯤 정기국회 준비에 분주했을 것이다.

오후 8시10분, 순대국집

여의도의 한 순대국집에서 이명박 후보를 담당하고 있는 한 일간지 기자와 만나 저녁을 먹었다. 이 후보 캠프 사람들하고 저녁 약속이 없었냐고 묻자, 그 기자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선 끝나고 캠프 사람들에게 밥 한번 먹자는 얘기를 못 들어봤다. 조·중·동 기자들 빼고는 완전 찬밥이다.”

ⓒ시사IN 윤무영권영길 후보 사무실 직원들이 당 결선 투표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명박 후보 캠프 사람들과 출입기자들의 관계가 소원해진 반면 박근혜 전 대표 캠프 사람들과 담당 기자들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고 전했다. 수시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함께 울분을 달랜다는 것이다. 그는 이 후보 캠프의 ‘조·중·동 우선주의’ 때문에 취재에도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캠프 관계자들이 전화도 제대로 안 받아서 조·중·동 기자를 거쳐서 취재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밤 11시45분, 유시민 후보 캠프 앞

유시민 캠프 허동준 공보실장이 연방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지만 캠프에는 허 팀장 외에도 20여 명이 남아서 분주하게 일을 보고 있었다. 후보 단일화와 관련해 질문을 던지자 그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유시민 후보가 대통령 되려고 나왔지 후보 단일화하려고 나왔습니까. 애꿎은 후보 단일화 때문에 유 후보의 정책과 비전이 완전히 묻혀버리고 있습니다.”

새벽 3시30분, 한양빌딩 앞

‘콜록콜록’ 한나라당 당사가 들어선 한양빌딩 앞에서 기침소리가 들린다. 빌딩 앞에는 40, 50대 남성 10여 명이 풍찬노숙하고 있다. 한나라당 경선 무효를 주장하며 23일째 철야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한뎃잠을 자는 이유는 천막을 치면 불법 건조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건물주로부터 고소당한 상태다.

이들은 매일 아침 8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국회 정문 앞에서 순번을 정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고 있는 모임으로 보이지만 자신들을 한나라당 평당원 모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철야농성 이유에 대해 대표자 격인 사람이 “우리는 특정 후보 지지자가 아니다. 한나라당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원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새벽 6시30분, 남중빌딩 입구

ⓒ시사IN 윤무영이해찬 후보 사무실 직원이 이 후보의 TV 토론 장면을 모니터하고 있다
손학규 캠프 대변인실의 장재혁씨가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그의 임무는 조간신문 스크랩이다. 신문 스크랩 프로그램을 활용해 일간지의 1면 톱기사, 정치사설, 정치기사 등을 스크랩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캠프 스태프에게 이메일로 발송한다. 당연히 기사와 사설은 손학규 후보를 중심으로 스크랩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가장 기다리는 기사는 손 후보의 당선기사다.

다시 돌아온 ‘여의지앵’의 계절

‘여의지앵.’ 파리 시민을 말하는 ‘파리지앵’을 패러디한 이 말은 서여의도 지역에 몰려들고 있는 정치꾼들을 일컫는 말이다. 어울리지 않지만 뜯어보면 이 둘은 닮은 구석이 많다. 일단 사교적이어서 만나면 누구든 친한 척을 한다는 것이 닮았다. 둘 다 점심시간이 길다. 그리고 반주를 곁들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파리지앵’이 와인을 마시는 대신 ‘여의지앵’은 폭탄주를 마신다는 것.

‘파리지앵’이 유행과 패션에 민감하다면 ‘여의지앵’은 민심과 권력에 민감하다. ‘파리지앵’이 연인을 자주 바꾼다면 ‘여의지앵’은 섬기는 주군을 자주 바꾼다. 어울리지 않는 콤비 양복을 입고 머리에 포마드를 잔뜩 바르고 악수는 꼭 두 손으로 하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하게 아는 척을 한다면 그는 바로 ‘여의지앵’이다. 일반인과는 확실하게 DNA가 다른 ‘호모 폴리티쿠스’, 그들의 계절이 돌아왔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