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재 교수(이화여대·건축학)

석달 전 ‘엘리베이터 끊고 살기’에 도전했던 동료 기자는 자기 사는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 한 달 동안 사람을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 계단이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페인광장 계단 같았다면 얘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임석재 교수(이화여대·건축학·사진)의 신간 〈계단, 문명을 오르다〉를 접하니 사람들이 왜 그 계단에 그토록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지 알겠다. 책에 인용된 한 건축가의 말에 따르면 이 계단에 깃든 디자인 정신은 ‘완벽한 편안함과 평등의 휴식’이다.

이 책은 건축물, 나아가 서양 문명사에서 계단이 갖는 의미에 주목한 국내 최초의 저작물이라 할 만하다. 사춘기 시절만 해도 임 교수는 골목길 계단 마니아였다. 시내버스를 타고 일부러 이곳저곳 골목길이 있는 동네를 찾아다니곤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계단 앞에 서면 한숨부터 나오더란다. ‘이건 뭔가 아닌데’ 싶었다. 개인적인 경험뿐만이 아니었다. 20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계단은 점점 기능과 효율을 중시하는 쪽으로만 발달했다.

임 교수는 한때 다양한 즐김의 대상이었던 계단이 이렇게 모두의 기피 대상이 된 데서 병든 문명의 징후를 읽어낸다. 그렇다 해도 ‘계단’이라는 테마만으로 이토록 심도 있는 인문사회적 통찰이 가능하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인간의 욕망이 집약된 투사체가 곧 계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늘에 닿고 싶은 ‘수직 욕망’이 고대 바벨탑을 낳았듯 바로크 시대의 부풀려진 욕망은 과장되고 비틀린 계단을 낳았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욕망은 또 어떤 계단을 탄생시킬 것인가.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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