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씨(위)는 〈누란〉에서 서사성의 해체에 비견될 만한 파격을 보여준다.

변신의 욕망이란 작가에게 매우 근원적인 갈증이다. 모든 작가는 새 작품을 쓸 때마다 그것이 이전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탄생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희망과는 별도로, 가령 독자들은 현기영의 문학을 ‘4·3항쟁’과 관련해 논의하거나 문학에서의 리얼리즘 개념과 결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현기영의 문학이 4·3과 관련한 소설 쓰기에서 기념비적 명작을 산출한 것은 분명하다. 또 그의 문학이 넓은 의미의 리얼리즘 문학을 심화하는 데 기여해온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소설을 꼼꼼히 읽다보면, 이러한 문학사적 평가 때문에 현기영 문학의 다채로운 실험의식과 미학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 생략되고, 주제의식 차원의 논의만 과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작가 역시 이를 의식해서인지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기점으로 좀 더 풍부한 문학적 실험을 다채롭게 전개하고 싶다는 포부를 개진한 바 있다. 사실 문학적 수련기에 그가 가장 깊이 매력을 느낀 작가가 제임스 조이스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의 문학에 깃들어 있는 현실주의적 상상력이란 결국 민주화라는 상황의 압력과 조건에 크게 기인한 것이다.

최근에 출간된 〈누란〉(창비)을 읽으면서 놀랐다는 사람을 여러 번 만났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못 놀라운 느낌이랄까, 의아한 감상에 빠져들곤 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현기영 소설의 고전적인 기율 또는 문법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으로 보였고, 더 나아가 서사성의 해체에 비견될 만한 파격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범주를 규정하자면, 이것은 ‘담론 소설’에 가깝다. 내러티브의 능란한 인과적 배치로 규정할 수 있는 소설적 플롯이 헐거워진 대신, 이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이 저마다 1990년대 이후의 시국과 정치적 변화에 대한 정론적 논의를 직설적으로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환멸적 세계상을 풍자

그 파격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7장에서의 교수와 학생들 간의 대화가 마치 개화기의 문답형 소설처럼, 혹은 희곡의 대사처럼 서술이나 묘사 없이 장황하게 나열돼 있을 정도이다. 작중인물이 펼쳐내는 담론 역시 민주화에 대한 역사적 평가로부터 소비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 비판, 그리고 각종 종말론과 파시즘의 대두에 이르는 다채로운 소재가 만화경처럼 펼쳐지고, 작중인물들의 요설과 직설이 제약 없이 만개한다.

이런 형식 실험이랄지 파격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도 가장 개연성 있는 해석은 오늘의 민주주의 폐색 상황에 걸맞은 환멸적 세계상을 그에 대응하는 소설형식의 해체와 파괴를 통해 알레고리적으로 풍자하려는 의도가 개입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사실 몰락하는 것은 우리가 직면한 세계뿐만 아니라 그 세계를 객관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소설 양식에 대한 신념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야기성으로 퇴행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담론으로 직행함으로써 도착된 현실에 대한 과감한 풍자를 담고자 했다.

기자명 이명원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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