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조선중앙통신이 지난 6월9일 건강이상설을 반박하기 위해 제시한 김정일 위원장 사진.
‘사회주의자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최근 몇 년간 김정일 위원장의 표정이 밝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지난 1월 하순 그가 김책제철소 현지 지도에서 했다는 말은 약간 의외였다. 1월20일부터 2주간 진행된 이 현지 지도에서 그는 ‘연말에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에’ 각종 기업소의 재가동을 준비하라고 독촉했다는 것이다(〈신동아〉 11월호. 일본 간사이 대학 이영화 교수의 글).

물론 당시는 독일 베를린에서 1월16일부터 18일까지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북·미 관계의 청사진을 놓고 ‘허리띠 풀어놓고’ 대화를 나눈 직후였다. 그의 낙관론은 바로 그 대화에 근거한 것일 터이지만, 사실 그 뒤로도 북한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해 이내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니, 벌어지고 있다. 그의 ‘예언’대로 갑자기 북한의 형편이 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9월부터 몇몇 나라와 자신의 ‘출연’을 둘러싼 교섭을 벌여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다. 9월에 중국과 물밑에서 벌인 교섭은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났다. 10월 들어서는 초순의 남북 정상회담 ‘출연’이 있었고, 16~18일에는 평양을 찾은 농득마인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북·베트남 정상회담이 열렸다.

최근의 낭보는 바로 베트남 쪽에서 먼저 들려왔다. 지난 10월의 정상회담 대가로 베트남이 북한에 식량 약 30만t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정상회담 당시에도 베트남이 대북 쌀 지원을 재개했다는 소식은 있었다. 그러나 예년과 같은 1만~2만t 수준으로만 생각했지, 30만t에 이르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 소식을 전해준 대북 소식통은 “베트남 서기장이  반세기 만에 평양을 찾았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국내에서 간과한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북한과 베트남의 협력 관계 재개가 단순히 북한이 베트남의 도이모이를 벤치마킹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거대 중국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베트남과, 중국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북한은 서로 동병상련 처지다. 베트남에게는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하고, 북한은 베트남으로부터 식량과 에너지를 지원받을 수 있다.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이 ‘도이모이를 벤치마킹 하겠다’고 했을 때, 중국은 당연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을 종전 협상의 당사자에서 뺄 수도 있다고 이미 한 차례 ‘협박’을 가했던 김 위원장의 두 번째 펀치인 셈이다. 그리고 세 번째도 이미 준비돼 있다. 김 위원장이 농득마인 서기장의 초청에 응하면서, 내년에 중국 종단철도를 타고 베트남을 육로로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는 얘기가 최근 전해졌다. 이 구상이 성사된다면 중국에게는 지난해 있었던 김 위원장의 중국 남부 순방 스펙터클을 뒤엎는 ‘악몽의 스펙터클’이 될 것이다.

중국의 방중 초청 대가는 식량 10만t

최근 중국 당·정의 현역 당국자들이 펴낸 〈대북조선·중국 기밀파일〉(일본 문예춘추사)이란 책에는 북·중 관계 50년사에 대한 중국의 낭패감이 짙게 배어 있다. ‘50년 동안 중국이 조선에 지원한 양을 따져보면 조선을 하나 더 만들고도 남을 정도다. 그런데도 조선과의 교섭에서 늘 양보만 해야 했다.’ 그 ‘조선’과의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고자 한 게 후진타오 주석의 생각이었겠지만, 덕분에 그는 홍역을 치렀다. 10월 중순 열린 17차 중국 공산당대회에서 조선과의 관계 악화가 당내 비판의 도마에 올랐고, ‘김정일 위원장을 반드시 베이징에 초청해 종전선언 협상에서 중국을 제외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는 방침을 수행해야 할 처지라고 한다.

농득마인 서기장이 다녀간 후 득달같이 평양으로 달려간 류윈산(劉雲山)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처 서기 겸 선전부장(10월29일)과 관련한 뒷얘기가 최근 흘러나왔다. 지난 10월30일 중국 신화통신은 류 부장이 김 위원장의 방중을 초청하는 후진타오 주석의 ‘커우신(口信·구두 메시지)’을 전했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커우신’이 아니었다. ‘꼭 와주십사’ 하는 매우 절박한 심경의 초청장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공짜가 아니다. 일단 방중 초청장이 발급되면, 식량 10만t과 난방용 연료 등을 ‘출연료’로 지급하는 게 관례이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은 최근까지도 묵묵부답이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베이징은 속이 타들어간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이 껄끄럽게 생각하는  경쟁자들이 지금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갑작스러운 출현도 충격이었지만, 북한을 위해서는 단 1달러도 쓰지 않을 것 같던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미 지난 10월22일 대북 중유 지원을 위해 1억600만 달러(약 968억원)의 예산을 의회에 신청해둔 상태이다. 이 밖에도 올겨울과 내년 춘궁기에 걸쳐 미국이 대규모 식량 지원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꾸준히 거론 중이다.

ⓒ연합뉴스국제 구호단체들이 나누어주는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북한 주민.
미국의 지원 약속에 대해 북한 측 관계자들은  ‘미국이 과연 ‘한 달러’라도 넣겠는가’라며 긴가민가해한다. 그래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오히려 미국의 적극적인 대시를 ‘선용’해서 같이 달려가 보자는 태도가 역력하다.

나름의 계산도 서 있다. 미국이 북한과 동행하기 시작하면 일본은 자동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 일본의 총리가 아베에서 후쿠다로 바뀌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수교 배상금 액수가 크게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베 총리 시절 북·일 간 물밑 협상에서 일본 측이 제시한 수교 배상금 액수는 겨우 7억 달러였다. 그러나 후쿠다로 바뀌자마자 다시 100억 달러로 원상회복됐다고 한다. 결국 북·미 관계 개선이 바로 일본의 100억 달러 배상금 지원으로 연결되면, 1990년대 내내 북에 따라붙었던 불운을 마침내 떨쳐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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