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독자 체험, 끊고 살아보기’의 주인공인 박은정씨(논술 강사)의 출현으로 〈시사IN〉 기자들이 긴장했습니다. 〈시사IN〉 연재가 있기 전부터 대형 마트면 대형 마트, 텔레비전이면 텔레비전, 페트병이면 페트병 이미 다 끊고 지냈다는 박씨의 내공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수에게도 약한 고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밀가루 음식이었답니다. 밀가루 음식을 끊은 김에 식습관을 송두리째 바꾸려다 인간관계까지 끊길 뻔했다는 박씨의 무한도전 분투기를 소개합니다.

〈시사IN〉 연중 기획 ‘끊고 살아보기’는 꽤 흥미로운 코너였다. 보통은 순서대로 기사를 읽는 편인데 이번 호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 순서를 견디지 못하고 미리 읽어버리고야 마는 지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시사IN〉 기자들이 소개한 대부분은 내가 이미 실행하고 있거나 선택적으로 실천하던 것이기에 ‘끊기’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했던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대형 마트의 경영 방식과 과소비를 부추기는 판매가 싫어서 발길을 끊은 지는 해를 넘겼고, 음주는 거의 하지 않으며, 포털의 낚임 방지를 위하여 구글을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그 다음 소개된 담배 끊기도 흡연을 하지 않는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텔레비전도 선택적으로 시청하고, 생수병도 사본 지 오래다.

분식집의 수많은 음식 중에서 박은정씨(위)가 먹을 수 있는 것은 김밥뿐이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끊고 살아보기’ 중 도저히 할 수 없는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휴대전화 끊기’와 ‘밀가루 끊기’였다. ‘휴대전화 끊기’는 현재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내겠다. 더 큰 문제가 바로 밀가루 끊기였는데, 내가 평소 좋아하는 음식을 꼽아보자면 이렇다. 파스타 피자 햄버거 튀김 떡볶이 라면 과자 빵 치킨 삼겹살…. 하루 세 끼를 밥만 먹는 건 몸에 대한 학대(?)라고 생각하며 살던 나는 앞서 열거한 메뉴로 하루 한 끼 이상을 때우곤 했다.

그랬던 내가 밀가루를 끊은 지 두 달째가 되어간다. 밀가루뿐만이 아니다. 육류와 즉석 식품, 카페인 음료, 탄산 음료, 아이스크림 등 식생활의 혁명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다방면으로 끊기를 하고 있다. 이 지독한 끊기를 결심한 데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MBC 스페셜 〈목숨 걸고 편식하다〉편을 아주 관심 있게 본 덕분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육류 생선 달걀 우유 따위가 ‘고단백’이 아니라 ‘과단백’이어서 우리 몸의 균형과 건강을 해친다는 얘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끊기를 실천하려는 또 한 가지 이유, 곧 건강한 임신을 위해서도 음식을 독하게 가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기를 시작할 때의 고통은 생각보다 컸다. 강박관념이 있었는지 종종 꿈도 꾸었다. 과자를 실컷 먹고 나서 ‘아참! 나 이거 먹으면 안 되는데…’ 하다가 놀라서 깨는 꿈이었다. 일을 하러 갈 때면 시장 골목을 지나쳐야 하는데 그 또한 고문이었다. 나를 유혹하는 갖은 먹을거리들의 향연에 때로는 박형숙 기자처럼 마스크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지금은 뒷골목으로 다니고 있다).

나 홀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도 있었다. 바로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가 그런 경우였다. 우리 가족은 모이면 으레 삼겹살을 먹는데 혼자 갖은 채소에 밥만 싸서 먹어야 했다. 밖에서 만난 지인이 도너츠에 커피를 마실 때도 나는 물만 들이켰다.

타인을 배려하면 ‘끊고 살기’ 성공 못하니…

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나와 식성이 비슷해서 ‘맛집 친구’라 부르며 10년 넘게 우정을 나눈 친구인데, 내 기억으로 우리 둘이 한식을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친구에게 요즘 나의 ‘끊고 살아보기’ 생활을 말해줬더니 대번에 얼굴 표정이 안 좋다.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밀가루 음식과 육류가 아닌 것을 찾자니 정말 갈 만한 음식점이 너무 없었다. 별수 없이 분식집에 갔는데 메뉴판에 적힌 떡볶이와 라면과 만두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평소 여러 메뉴를 시켜서 함께 나눠 먹었는데, 이제는 그게 안 되니 친구의 눈빛은 섭섭함을 넘어 원망에 가까웠다. 결국 난 김밥, 친구는 라면을 주문해 짧은 점심을 마치고 헤어졌다. 어쩐지 이 친구 당분간 내게 연락을 안 할 듯싶다. 미안하다, 친구야. 하지만 어쩌랴. 타인을 배려하기 시작하면 ‘끊고 살아가기’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것을….

이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일단은 대체 음식을 빨리,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급선무다. 일단 적당한 단백질 섭취를 위해 쌀밥에서 현미밥으로 바꾸고 된장찌개, 나물 반찬, 채소 쌈 등을 주식으로 했다. 문제는 간식거리였다. 여러 화학 첨가물에 길들여진 입맛이라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자극적인 식생활을 바꾼 뒤 채소나 곡식, 과일이 지닌 그 특유의 맛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밋밋하기만 하던 두유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고소하고 달콤하고 약간의 짠맛까지 전부 느껴졌다.

지난 두 달간 내가 찾아낸 대체 음식은 다음과 같다. 입이 심심할 때는 누룽지·볶은 콩·쌀과자·견과류를, 단것이 생각날 때는 찹쌀떡(안에 팥앙금이 초콜릿 구실을 한다), 단호박(쪄서 꿀을 뿌려 먹는다)을 먹는다. 우유 대신 두유를 마시고, 커피나 녹차는 대추차·유자차·생강차로 바꾸었다. 포만감을 느끼고 싶을 때에는 옥수수·감자·고구마를 쪄 먹고, 토마토·복숭아·포도·사과 같은 제철 과일로 호사를 누린다.

먹을거리 구입은 거의 생협을 이용하는데 산지에서 바로 매장이나 집으로 배달되므로 싱싱함이 그만이다. 땅의 힘과 농부들의 정성으로 자란 것들이어서 그 맛도 일품이다.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사보기도 했는데 선입견 때문인지 생협 제품에서 고유의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다. 가격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한 달 식비를 따져보니 예상 외로 ‘끊고 살기’ 이전과 차이가 거의 없었다. 외식비나 간식비 또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비용이 줄었기 때문인가보다. 그러면서 몸은 건강해졌으니 훨씬 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

좋은 몸, 좋은 식습관, 좋은 가치 얻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끊고 살기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끊고 사는 삶에 얼마나 많은 매력이 있는지…. 지금 내가 하는 ‘식생활 대혁명’ 역시 여러 매력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역시 몸이 건강해진다는 점이다. 땅의 힘으로 자란 채소·과일·곡식을 먹는 사람과 화학 첨가물·인공 조미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의 몸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식습관을 바꾸면 몸은 금방 반응한다. 운동만으로는 잘 빠지지 않던 군살이 식습관을 바꾸면서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많은 여성의 고민인 화장실 걱정도 이제 그만이다.

두 번째는 아름다운 소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협에서 판매하는 식료품 대부분은 국내산이다. 생산지도 분명하고 매주 소식지를 통해 언제 어떤 품목이 나오는지 알 수 있다. 농부의 수고로움과 정직함, 그리고 훌륭한 맛에 적정한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먹을거리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는 요즘, 적어도 불안해하지 않고 믿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셋째는 절제의 미학을 배운다는 점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식습관을 바꾸고 보니 그동안 내 몸을 너무 학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빵 대여섯 개를 사면 한 번에 서너 개는 족히 먹어 치우던 것이 두 달 전 내 모습이었다. 목구멍까지 음식이 차 있어도 좋아하는 것은 절대로 남기지 않고 내 몸이 힘들어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던 그 시절과 달리 지금의 나는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안타깝게 사라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햄버거 하나를 얻기 위해 소를 키우고, 소를 키우기 위해 숲을 태우고, 소고기 100g과 맞바꾼 4.5㎡의 사라진 숲은 지구의 온도를 매 순간 높인다’는 햄버거 커넥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 지독한 끊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선택적으로 섭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끊고 살아보기를 하기 이전의 생활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그러기에는 끊고 살아보기가 지닌 매력이 너무 많다. 아직 시장 골목을 유유히 지나칠 만큼 내공을 쌓지는 못했지만 내 혀에 맛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있다는 괴로움보다는 좋은 몸, 좋은 식습관, 좋은 가치를 얻었다는 만족감이 더 크다. 기회비용의 극대화가 별것인가. 이 정도면 끊고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기자명 박은정 (독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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