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아르노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위)은 프랑스 최고 부자이다.
프랑스 신문들이 최근 몇 년 새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침 저녁 전철역 앞에서 배포되는 메트로를 비롯한 무료 신문은 어느새 프랑스 신문의 최대 경쟁자로 떠올랐다. 프랑스 신문의 위기는 비단 독자 수 감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문 소유구조가 재벌 중심으로 재편됨에 따라 거대 자본이 주요 언론사를 소유하는 현상이 만연해 있다. 프랑스 기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상황이 언론 자유에 심각한 위협이 되리라고 걱정한다.

재벌 그룹의 영향력을 가장 크게 받는 미디어는 경제 신문이다. 프랑스 최대 경제 일간지 '레 제코' 사태는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08년 창간된 ‘레 제코’(Les Echos)는 최근 프랑스 신문시장의 축소에 따라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다. 레 제코를 가지고 있던 피어슨 그룹은 올해 6월 레 제코 매각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놓칠세라 프랑스 유수의 거대 그룹들이 신문 인수 경쟁에 뛰어들었다. 결국 레 제코의 인수자로 선정된 것은 루이뷔통·지방시 등 유수 브랜드를 가진 세계 1위 사치품 기업 LVMH이었다.

LVMH의 모기업은 까르푸 및 크리스찬 디오르 등을 자회사로 거느린 아르노 그룹이다. 아르노 그룹의 총수인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는 프랑스 제1의 재산가이며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프랑스의 ‘이건희’라고 할 수 있다. 인수 당시 아르노 그룹은 또 다른 유력 경제 일간지 ‘라 트리뷴(La Tribune)’을 소유하고 있기도 해, 한 거대 자본이 프랑스 1·2 경제 일간지를 모두 장악하게 된 것이다.

기자들은 프랑스 최고 권위의 경제 신문이 거대 자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식에 놀랐다. 피어슨 그룹이 매각 방침을 발표한 6월부터 레 제코 기자들은 노동조합에 해당하는 기자조합과 직원 총회를 통해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곧이어 LVMH가 협상 대상자로 확정되자 기자는 물론, 전 직원이 파업에 돌입했고 이후 신문 발행과 파업을 병행하며 매각 반대 활동을 벌였다.

레 제코는 ‘매입’, 라 트리뷴은 ‘매각’

레 제코 기자들이 파업에 나서자 계열사 기자들도 동참했다. 아르노 그룹이 소유한 신문 ‘라 트리뷴’ 기자·직원 역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매각 협상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 두 신문의 직원들은 한시로 연대 파업을 벌였고, 가판대 신문 판매 중지, 법원에 매각 진행 반대 처분을 요구하는 등 다방면의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지난 7월16일 ‘레 제코’는 자사 매각에 반대하는 정재계·학계·문화계 인사 600여 명의 명단을 발표했고 이어 기자조합 명의로 프랑스 총리에게 이 매각이 재앙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Flickr프랑스에서는 거대 자본이 주요 언론사를 소유하는 현상이 만연해 있다. 위는 최근 재벌 그룹에 넘어간 경제 일간지 레 제코를 읽는 독자들.
10월6일에는 ‘레 제코의 독립’이라는 사설을 통해 “경제 및 금융 정보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레 제코가 지금처럼 지속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아르노 그룹에 매각되는 것을 반대하고 자신들의 편집권 독립을 지지하는 각계각층 인사의 명단을 지면에 실었다.

레 제코 기자들의 파업에 지지를 보내는 다른 신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지난 11월 9일 ‘르 몽드’는 ‘독립’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신문이 자유의 도구가 되려면 모든 권력에 대한 기자의 독립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각종 사치품과 유통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아르노 그룹이 레 제코를 인수하게 되면 독자들은 더 이상 레 제코의 기사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르 몽드는 레 제코 전 직원들의 싸움이 곧 자신들의 싸움이라며 사설을 끝마쳤다.

‘리베라시옹’은 10월16일자 신문에서 ‘레 제코의 싸움’이란 기사를 통해 신문 독립을 위한 그들의 활동이 자유를 위한 상징적 모범 사례가 될 것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주간지인 '누벨 옵세르바테르'는 10월26일자에서 인수 협상이 시작된 사실만으로도 아르노 그룹이 직·간접으로 레 제코의 편집 방향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지적하며 신문 매각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유럽 신문 자유의 날’이었던 11월4일 수십 명의 기자와 시민은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여 레 제코 매각의 문제점 및 기자의 자유를 강조했다. 비록 레 제코 기자조합 대표 카티 코엥(Katty Cohen)이 말한 대로 개인주의적이고 노선차가 심해 ‘절대로 뭉치지 않는’ 프랑스 기자들이라 많은 수가 뭉치지는 않았지만 각자 노선이 다른 여러 기자조합들이 모인 시위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에 충분했다.

지난 11월5일, 결국 아르노 그룹의 LVMH 사는 2억4000만 유로에 레 제코를 인수했다. 프랑스 문화 및 음향·영상 분야 대통령 고문인 조지 마크 브나모는 이 매각을 두고 ‘신문을 위한 훌륭한 소식’이라며 환영한 반면 ‘레 제코’의 기자·직원들은 이 소식에 파업으로 대답했다. 한편 아르노 그룹은 자사가 소유 중인 ‘라 트리뷴’은 오히려 매각하기로 결정하고 11월18일 매각 대상자로 한 개의 케이블TV 채널과 두 개의 라디오 채널 및 인터넷 방송 등을 소유한 미디어 그룹 '넥스트라디오TV'를 선정했다. 넥스트라디오TV는 재정 상태가 좋은 라 트리뷴의 매각에 4억 유로 정도를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아르노 그룹은 2위 경제 신문에서 1위 경제 신문으로 말을 갈아탄 셈이 되었다. 

프랑스 언론 매체 가운데 르 몽드 등 몇몇을 제외하면 대다수는 거대 자본의 소유이다. 건설회사로 시작해 대를 이어 부자가 경영하고 있는 부이그(Bouygues) 그룹은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과 친분을 쌓으며 프랑스 텔레비전 1번 채널과 이동통신사까지 진출했다. 세계 2위의 항공 방위산업체이며 유로파이터의 공동 제작사인 라가르데르(Lagardere) 그룹 또한 족벌 기업으로 자회사를 통해 세계 3위의 발간량을 자랑하는 아쉐트(Hachette) 출판사 및 아쉐트 잡지사를 소유하고 있다. 역시 족벌 기업인 볼로레(Bollore) 그룹은 화학, 에너지, 농산물 산업 등과 통신시장에 진출해 있고 무료 신문으로 아침에 배포되는 마탱 플뤼스(Matin Plus)와 저녁에 배포되는 디렉트 수와(Direct Soir)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레 제코의 기자들과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싸움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매각이 타결된 상황에서도 아르노 그룹이 편집권을 침해할 수 없도록 법인 조처를 해줄 것을 정부와 아르노 그룹에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다시 파업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레 제코의 일부 기자는 아르노 그룹 아래에서 기사 작성의 자유를 침해당하기보다는 아예 직장을 옮기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법원의 판단 아래 급여 따위 조건을 유지하면서 다른 언론사로 이직하는 제도를 통해 기자의 자유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기자조합 측에서는 각자 자리를 지키면서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들을 만류하고 있다. 또한 레 제코는 매각이 일단락된 상황이지만, 라 트리뷴의 경우 매각 협상과 매각 협상 반대운동도 시작되었다. 프랑스 상황은 한국의 현실과 닮았다. 자본은 언론을 얻으려 하고 언론은 자유를 얻으려 애쓴다.  

기자명 파리=표광민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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