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는 간혹 어떤 계기를 부여한다. 책을 읽고서 마음을 다잡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무슨 책을 읽는 데도 계기가 필요하다. 대개 어떤 책이든 한 번 읽고 마는 나로서는 같은 책을 다시 읽을 때 더욱 그렇다.

“〈IQ84〉를 읽으면 궁금해지는 소설, 〈1984〉” 최신 번역판 띠지의 헤드 카피다. 〈IQ84〉(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는 궁금하지 않지만, 〈1984〉를 또 읽고 싶던 평소 생각에 불을 댕겼다. 띠지 반대편을 수놓은 이 작품의 화려한 추천 이력은 부질없다.

조지 오웰(위)의 대표작인 〈1984〉는 1949년에 발표되었다.

가장 최근 번역이 엄청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예전 번역 중 하나를 한참 전에 읽은 탓일까. 텔레스크린(텔레비전 스크린)에 나타난 에어로빅 강사는 존재 자체부터 참신하다. 제목에 한 글자가 더 많은 〈1984년〉에도 “서른아홉에 아이도 넷이나 있는 여자”가 있었나? 있다. 굽혔던 몸을 편 다음 덧붙인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나는 적잖이 압박을 받는다. “마흔다섯 아래로는 누구든 충분히 발가락 끝에 손을 댈 수 있어요.” 이런, 사십 줄에 들어서 민방위 소집 해제와 함께 군역을 다 마친 줄 알았건만 앞으로 한두 해 더 남았다니!

텔레스크린은 양방향이다. 스크린 속 강사와 스크린 밖의 ‘수강생’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감시 장치다. 오세아니아(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일컫는 것이 아님)의 텔레스크린 ‘보급률’은 의외로 낮다. 인구 비율로 따져 15% 정도 되는 내·외부 당원은 집과 일터와 공공장소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어렵다. 내부 당원에게는 텔레스크린을 30분간 꺼놓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85%에 이르는 비당원에 대한 감시는 주로 곳곳에 감춰놓은 마이크로폰이 대신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절대자 ‘빅 브러더’와 함께 널리 알려져 있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은 완곡어법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더하여 “이중사고란 과거의 기록을 날조했다는 사실을 곧 잊고 그 날조된 허위 사실을 진실로 믿는 심리 작용을 말한다.”(‘해설’에서)

〈1984〉는 비극이다. 여기서 비극은 사생활과 사랑과 우정과 가족 간의 긴밀한 유대가 있던 시절의 유물이다. 언론·교육·문화를 관장하는 진리부 기록국 직원 윈스턴 스미스의 개인사 또한 비극적이다. “거의 30년 전에 있었던 어머니의 죽음이 그 이상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이고 슬픔이라는 사실이었다.” 윈스턴은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자책한다.

윈스턴의 애인 줄리아는 약간 멍청한 것 같아도 세상사에 밝다. 그녀는 적들의 일상적인 로켓 폭탄 공격을 국민에게 공포감을 주려는 정부의 자작극으로 본다. 그녀의 언론관은 놀랍기까지 하다. “뉴스라는 게 어쨌든 다 거짓말이니까요.” 나는 어느 신문의 8월26일자 1면 서브 헤드카피를 장식한 기만적인 표현을 보고 일순 아찔했다. 이 신문까지 그럴 줄이야! ‘절반은 성공’에는 과연 반에 반의 진실이라도 담겼을까? ‘절반의 성공’은 이중사고의 극치다.

지난해 6월 하순 겪은 봉변을 떠올리게 한 대목에서는 섬쩍지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참석한 마지막 촛불집회가 된 일요일 오후, 나는 서울 중심가 길모퉁이에서 집회 참가자의 도로 진입을 막아선 전경에게 농지거리를 하다가 불현듯 나타난 어느 아줌마한테 “2+2가 몇인 줄 알긴 하느냐…”라는 핀잔을 들었다. 핀잔의 주된 내용은 불명확했지만 덧셈 문제는 또렷이 들렸다.

나는 지금까지도 아줌마의 돌발 질문이 어째서 1+1이나, 3+3이 아니라 2+2였는지 궁금하다. 윈스턴은 금지된 일기에다 공리(公理)를 세우는 기분으로 이런 글귀를 적는다. “자유란,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이다.”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건네준 ‘그 책’에도 “둘 더하기 둘”이 나온다. 이제 ‘절반의 궁금증’은 풀린 듯싶다. 나는 아줌마의 꾸지람을 듣고도 아직 정신 못 차렸다. 다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언행을 각별히 주의한다.

기자명 최성일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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