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 소설에 대한 한국 독서계의 반응은 양가적이다. 몇몇 예외는 있지만 지식인 독자의 경우는 일본 소설을 과소평가하는 데서 더 나아가 경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반면 대중 독자들은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일본 소설 한두 편은 흥미롭게 읽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한국의 대중 독자가 하위 문학으로부터 본격 문학에 해당하는 작품까지 흥미롭게 읽는가 하는 문제는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지만, 현대 일본 소설이 미니멀한 소재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오타쿠’적인 열정으로 핍진하게 탐구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비범한 알레고리적 분석과 비판에 능란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다. 소설적 공간과 인물의 생활세계는 과감하게 축소하되, 그 축소된 세계에서 겪게 되는 갈등의 드라마를 보편적인 인간 조건의 한 비유로 제시하는 능력은 탁월한 게 일본 소설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일본 소설이 그런 경향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다. 최근에 출간된 세노오 갓파의 〈소년 H〉(페이퍼로드)라는 작품을 읽고 나서 오늘의 일본 소설과 독서계에서도 이른바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 능력이 돋보이는 문제적 작품이 간헐적이나마 발표되고 있으며, 이런 작품에 대한 독서열 역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소설은 일종의 자전적 성장소설에 해당하지만, 작중 인물의 성장기가 중·일 전쟁기인 1937년에 시작되어 패전과 미 군정기까지 걸쳐 있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의 격렬한 떠오름과 침몰에 대한 시대적 증언까지 감당하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인 H는 소년이고, 당대의 숨 막히는 시국 상황 역시 ‘순진한 소년의 눈’으로 서술되고 있기에, 격변하는 세계사적 현실에 대한 입체적 분석에서는 한계를 보인다.

과거사에 대한 작가의 책임의식과 성찰

그러나 고베라고 하는 한정된 공간에 거주하는 여러 작중 인물의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숨 막히는 시국의 격변과 맞물려 파괴되고 또 마멸되고 있는가를 매우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묘사하기 때문에, 역으로 해당 시기를 식민지의 주민으로 살았던 우리의 과거사를 반추하면서 읽다 보면, 예기치 않았던 전율에 빠져들게 된다.
 

‘소년 H’는 일왕의 전쟁 책임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위는 패전 후 왕궁에 절하는 일본인.


특히 이 소설에는 일제 말기 일본에 거주하던 평범한 일본인들이 과연 시국의 변화 속에서 어떤 열망과 절망을 체험했으며, 이 전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동원되어 비정한 죽음의 체제에 용해되어 갔는지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반대로 전시 체제에 저항하거나 비협력적 태도를 취했던 평범한 일본인들이 어떻게 시대의 폭력 앞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에 직면하거나 인격 분열 상태에 처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공감적 시선 역시 음미할 만하다.

특히 일본의 지식인에게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일왕의 전쟁 책임 문제를 ‘소년 H’가 반복적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거사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책임 의식과 비판적 성찰 능력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니 꽤 심각한 소설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소설의 전반적인 톤은 유머로 충만한 것이어서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기자명 이명원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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