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그가 처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내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부정이 없었다면 그 선거에서 그가 이겼으리라 말하는 관측자가 많지만, 부질없는 소리다. 설령 그가 당선했더라도 박정희가 순순히 정권을 넘겼을 것 같진 않다. 어쩌면 그는 그 선거에서 아슬아슬하게 진 덕분에 목숨을 보전했는지 모른다. 동토의 16년 세월을 보내고 1987년 그가 다시 대선에 나왔을 때, 나는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다른 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더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한 짓이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1992년과 1997년 대선에서 나는 투표를 하지 못했다. 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투표를 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가 15대 대통령에 당선했다는 소식을 이역에서 듣고, 나는 기뻤다. 콧등이 시큰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적어도 다른 대통령들에 견주면 그렇다. 내가 정치적 스트레스를 가장 덜 받았던 시절이 그의 집권기 5년 동안이었다. 물론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유신 잔재 세력과 손을 잡지 않고 단독 집권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른바 DJP 연합이라는 것을 막무가내로 비판했던 민주주의자들을 나는 무책임하다고 여긴다. 그런 ‘더러운’ 거래가 없었더라면, 자유주의 정권 10년은 불가능했을 게다.

역사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한 세계사적 개인

당선하자마자 그가 처음 한 일이 내란죄 수괴를 풀어주라고 현직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이라는 점도 매우 못마땅하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에게, 민간인 학살자 면책은 뒤숭숭한 일이었을 것이다. 17년 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를 용서하는 것이 그의 가톨릭적 박애주의나 국내 정치적 타산에는 부합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1980년 5월 학살된 이들에 대한 예의에서 크게 벗어난 정치 행위였다. 외환위기를 치유하기 위해 그가 채택한 신자유주의적 처방은 사회 양극화를 심화하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양식 있는 자유주의자로서 어렵사리 늘린 서민 복지(예컨대 기초생활보장제)는 그 양극화를 중화하기에 태부족이었다. 전임 정권들에서처럼, 그의 정부에서도 부패 스캔들이 거듭 터져나왔다. ‘나라의 어른’으로서, 그가 자식들에게 사사로이 드러낸 집착도 보기 흉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역사와 대화할 줄 안 첫 대통령이었다. 역사의 도전에 적절히 응전한 세계사적 개인이었다.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나 서울대학교 졸업장은 없었으나, 그는 전임자들 누구보다 더 지적이었다. 그가 정치인의 자질로 꼽은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조화’를 고스란히 체현한 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궁극적 통일이었다. 그가 정적들의 비판 속에서 꿋꿋이 수행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이미 그의 재임 중에 긍정적 효과를 낳았고, 그 다음 정권에서 남북 교류를 더욱 활성화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의 정부 아래서, 대한민국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극성기를 맞았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좌파 정책’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며 가장 비열하고 모난 언어로 그를 두들겨 패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소수파 정부라는 한계와 여론 때문에 그는 국가보안법도 사형제도 없애지 못했지만, 그의 집권기에 들어 처음으로 사형 집행이 중단됐고 보안법이 그 사나운 발톱을 숨겼다. 독립 기구로 설치된 국가인권위원회는 상징 차원에서나 실제 차원에서나 인권 신장의 원기소가 되었다.

그의 집권기에 내가 쓴 시사 칼럼들을 훑어보니, 그에게 호의적인 것보다 비판적인 것이 훨씬 더 많다. 저널리즘의 본령은 비판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게 강요한 자기 검열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뒤쪽은 맞는 것 같다. 내가 그와 넓은 의미에서 동향이라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한 호의를(설령 그것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호의라 판단된 때라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게 하고, 그의 자잘한 잘못들에까지 엄격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1987년에도, 아니 투표권이 없었던 1971년에도 이미 나는 그의 지지자였음을. 그리고 나는 또 안다. 1998년 2월 말부터 다섯 해 동안, 자신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그가 있었음을. 지난 쉰 해 동안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

기자명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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