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소 노동자들을 지원하려다 기물을 파손한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언론에 의해 폭력 집단으로만 묘사됐다.
대다수 언론이 삼성 비자금 사건을  소극적으로 보도하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한 신부는 “신정아 사건 때 미친 듯 달려들던 언론이 하나같이 입을 닫았다”라며 분개했다. 삼성이 적극 해명을 하고 나서야 보수 언론들은 사건을 큰 지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과 삼성의 반박 내용을 매우 ‘공평하게’ 같은 비중으로 배치했다. ‘뇌물’을 굳이 ‘떡값’이라는 표현으로 순화하고 기사 제목에 ‘공방’ ‘진실 게임’ 따위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언론이 이 사건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언론이 이렇게 지혜로운 판단을 일상적으로 적용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노동 관련 사건이 그렇다.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가공할 폭력과 인권 유린이 벌어져도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던 언론이 이들을 도와주러 온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휴게소 기물을 파손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동영상은 물론 회사 경영자의 인터뷰까지 곁들여가며 상세히 보도했다. ‘휴게소 습격 사건’이라는 선정적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회사 측의 폭력 행위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앵커가 “공공장소에서의 폭력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라고 엄숙히 충고하는 말이 노동자들의 가슴에는 비수처럼 꽂혔다.

언론도 경찰도 믿을 수 없는 노동자들

지난 10월21일 아침, TV 뉴스에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고속도로 휴게소의 기물을 파손하는 화면이 나오는 순간, ‘아, 말려들었다’ 싶은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이어 그 휴게소 노동자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위원장님 이하 모두 잘 있어요. 언론 보도는 왜곡된 부분이 있어요. 우리는 괜찮습니다.”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휴게소 기물이 파손됐는데, 정작 그 휴게소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잡혀가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새로 온 관리자가 여성 노동자들과 아버지뻘 되는 환경미화원에게 “눈깔을 파내버리겠다” “○○놈, 죽여버리겠다”라고 협박을 일삼아도 조합원들은 경찰에 신고할 수 없었다. 구사대 역할을 자임한 협력업체 사장들의 비열한 성추행도 스스로 해결하고, 노조위원장 집에 몰래 침입한 괴한이 인형의 목과 다리를 처참히 3등분으로 절단해놓고 사라지는 일이 벌어져도 참아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견디면서 승리하는 길뿐이다.

언론도, 경찰도, 노동부도 모두 믿을 수 없는  노동자들은 “위원장님이 ‘내가 목매고 죽으면 다 해결될 거야’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신 적이 있는데요, 며칠 전부터 신변을 하나씩 정리하고 계세요.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닌가 두려워 죽겠어요”라고 울먹이며 전화를 한다.

회사 측에 털끝만큼의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는 조합원들은 하루 종일 입을 닫고 생활하는 것은 물론, 어쩌다 손님이 찾아와도 회사가 ‘근무지 이탈’로 문제 삼을 수 있다며 배웅도 나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앞으로 경찰조사 결과는 “화물연대와 휴게소 노조위원장이 미리 계획해 화물연대 노동자들에게 술을 먹인 다음, 연장을 손에 쥐여주며 ‘사장 죽여라’고 선동해 폭동이 일어났다”라고 발표될 가능성이 높다. 아마 언론은 매우 ‘공정하게’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 보도할 것이다. 아, 위대한 대한민국 언론이여!

기자명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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