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창(법무법인 덕수 변호사)관행은 조직이 정체될 때 피어나는 독버섯과 같다. 업무상 재해임이 입증되는데도 부검 진단서를 필수 증빙자료로 요구하는 것은 행정 편의주의일 뿐이다. 관행보다 원칙과 피해 구제가 우선이다.
최근 세상을 떠난 선배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하늘에 계신 남편을 대신해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배 아내가 보낸 문자는 내 휴대전화에 저장된 선배 이름으로 전달되었다. 선배는 최근 몇 년 동안 대기업 노조 간부로 일했다. 갈등의 직접 당사자로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음은 물론이다. 노조 간부 임기를 마치고 다시 업무에 복귀했지만, 회사는 3개월이 다 되도록 그를 대기발령 상태로 묶어두었다. 회사 동료들은 ‘보복성’ 대기발령이라고 주장했다. 일에 파묻혀 살던 사람에게  대기발령은 고문과도 같았을 것이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 또한 그의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잠자리에서 뇌출혈로 돌연사하고 말았다. 그는 그동안 회사와 잦은 갈등 속에서 괴로워했고, 밤을 지새우거나 새벽에 깨어났다고 한다.

법률가로서 가족과 동료들의 진술을 모아보았고, 그들도 내게 산업재해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문의했다. 여러 진술을 종합하면, 그의 직접 사인은 뇌출혈이지만 사망의 주된 원인은 업무상 스트레스로 보였다. 당장 산재 판정을 받는 문제 때문에 유족들 사이에서 심각한 걱정거리가 생겼다. 산재 판정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체 부검을 하여 ‘부검 진단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 실무상 관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사망자의 업무 내역, 주변 진술 등 각종 증거가 보충되어 업무상 스트레스가 과중했다는 것을 또다시 입증해야만 한다. 문제는 아무리 업무 내역이나 증언, 증거가 충분하더라도 부검 진단서가 없으면 산재 판정을 받는 것을 거의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족은 사망자의 몸에 다시 칼을 대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유족 내에서도 의견이 나뉘었다. 최종 결정은 그의 부인이 내렸다. 그녀는 산재보험금을 포기하더라도 부검을 할 수는 없다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원칙으로 보면 사망과 업무상 재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 부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진료 기록을 꼼꼼히 챙기고, 진료를 담당한 의사의 소견을 좀더 자세하게 받는다면 의학적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부검 진단서를 필수 증빙자료로 요구하는 실무 관행은 행정 편의주의가 아닐 수 없다. 재판 과정에서 원칙과 실무가 서로 엇갈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모든 피고인은 무죄추정을 받는다는 헌법상의 원칙도 실무에서는 유죄추정 원칙으로 변질되어 지배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합뉴스유족이 사망과 업무상 재해의 인과관계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 위는 6월13일 산재 불승인 등에 항의하는 노동자 대회.
헌법의 ‘무죄추정’ 원칙이 실무에서 ‘유죄추정’으로 변질

교과서에서 유죄의 증거는 판사에게 확신을 줄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하고, 모호할 경우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검사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것이 법조계 실태이다. 법적으로 유죄 입증 책임이 검찰에게 있으나 실무상으로는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만 한다. 어떻게 범인이 아니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증거는 결코 직접적일 수 없다. 관행은 폐단을 낳기 마련이다. 관행이란 서비스 제공자를 위한 것이지 서비스 수혜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관행은 독버섯과 같다. 조직과 사회에 정체가 생기고 생동감을 잃을 때 관행이라는 독버섯이 피어난다. 업무상 재해로 인한 사망임이 충분히 입증된다면 부검 진단서가 없다는 이유로 배척할 것이 아니다. 관행보다는 항상 원칙과 실질적인 피해 구제가 우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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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송호창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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