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멀쩡히 영업하는 집을 왜 없다고 하노? 인터넷에는 우리 가게가 감독이 맹근(만든) 집이라고 한다매?” 영화 〈해운대〉에서 하지원(강연희 역)의 횟집을 실제로 운영하는 문촌댁 할머니(가명)의 말이다. 화려한 해운대의 모습과는 다른 소박한 어촌이 영화에 등장하자, 이곳이 세트일 것이라 추측한 관객이 많았다. 그러나 해운대 백사장 동쪽 끝에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어촌 마을이 있다. 어선 50여 척이 줄지어 선 작은 포구, 방파제 끝에 노란 천막과 빨간 등대가 있는 ‘미포’. 영화 〈해운대〉의 주인공들이 사는 곳이다.

영화에서처럼 문촌댁 할머니가 실제로 운영하는 천막 횟집도 무허가다. 40~50대 때 뭉친 아주머니들은 이제 70~80대 할머니가 되었다. 횟집을 같이 세운 아주머니 15명 중 지금은 10명만 남았다. 하루에 5명씩 이틀에 한 번 돌아가며 일한다. 젊었을 때는 고기를 직접 잡아 팔았지만 지금은 마을 주민이 잡아온 제철 생선을 떼어다 판다. 언제까지 일할 거냐고 묻자 한 할머니는 “여기 할머니들이 전부 죽을 때까지 장사해야지”라고 답했다. 영화를 보고 이곳을 찾는 사람도 간혹 있다. 부산 사상구에서 온 배재훈씨(27)는 “부산 사람이라 영화 배경이 미포인 줄 알았지만 이 횟집이 실제로 있는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동서로는 해운대 백사장 한국콘도 옆부터 청사포까지, 남북으로는 동해남부선 철길 아래 중1동 일대가 미포다. 미포는 부산에서도 보기 힘든 오래된 자연부락이다. 4대째 이 동네에 사는 장두환씨는 “6·25 때 피란민이 정착한 이후 주민 대부분이 몇 대째 해운대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이다”라고 전했다.
 

ⓒ전문수어업은 지금도 미포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위는 그물을 수리하는 어민 부부.

해녀와 어부들의 마을

이 지역 주민 100가구 300여 명 중 61명이 어업에 종사하고 나머지는 주로 횟집을 운영한다. 해녀도 있다. ‘해녀집’이라는 활어횟집을 운영하는 고복술씨(69)는 22세 처녀 때부터 50년 가까이 물질을 했다. 해녀에게 중요한 것은 비와 바람보다는 밀물과 썰물이다. 고씨는 한 달에 10~15회 정도 파도가 잠잠해진 틈을 타 바구니 하나 달랑 안고 바다로 나간다. 해녀 5명 중 가장 어린 김순이씨(57)는 해녀 경력이 30년이다. 결혼하고는 전업주부로 살았지만 아이가 여섯 살이 되자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해녀 일을 시작했다. 원래 제주도 해녀였던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른 어업 종사자들은 거의 배를 탄다. 30년 경력 어부인 김정한씨(50)는 “지금은 EEZ(배타적 경제수역) 경계선이 쳐져 있어 힘들지만 예전에는 배로 2시간 거리인 대마도 아래까지 가서 조업했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지진·해일이 처음으로 발생하는 지점이다. 이들은 새벽 2시30분쯤 바다로 나가서 아침 6시쯤 돌아와 간이 수산시장을 연다. 수산시장에서 만난 장정남씨(70)는 “한 번 배 타고 나가는 데 기름값·미끼값이 5만~6만원 드는데 하루에 10만~15만원어치 잡아오니까 아내랑 같이 나가면 하루 일당도 안 나온다”라고 한탄했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마을에 젊은이가 드문 것은 이 때문이다. 이곳에선 40~50대면 ‘청년’으로 통한다.

영화에 나오는 연희의 아버지처럼 배를 타고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5년 전에도 한 명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갑자기 몰아친 파도에 목숨을 잃었다. 이 이야기를 전하던 주민은 말없이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한국의 싱가포르’라 불릴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해운대 한쪽에 미포 지역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게 된 것은 이 지역의 개발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철길 위 달맞이고개에서 바다를 바라볼 때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미포에는 7층 이상(21m) 건물은 지을 수 없다. 김정한씨는 “옆 동네 청사포는 어항으로 개발해 넓은 곳에 배를 댈 수도 있고 해운대 동쪽 편에는 속속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데 여기만 그대로다”라고 푸념했다. 반면 재개발에 부정적인 사람도 있었다. 허강씨(74)는 “개발이 되면 부친 때부터 이어온 가게를 잃을까 걱정이다”라고 했다.
현재는 미포 입구까지 117층짜리 리조트 건설 바람이 불어닥친 상태다. 포구 바로 옆에도 5층짜리 현대식 활어회 타운이 생겼다. 곧 마을이 개발될 것이라는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구청 건축담당자는 “미포 지역 개발 계획이 당장 실현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전문수미포 입구 실제 모습(위)과 영화 장면(맨 위). 건널목 오른쪽에 117층짜리 리조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우여곡절 끝에 남은 소박한 미포의 모습은 그대로 영화의 세트가 됐다. 주민들은 지난해 여름 이맘때 영화가 촬영될 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정일씨는 “그때 NG 장면을 기억하니까 실제 영화랑 비교돼 재미있었다”라고 말했다. 신풍슈퍼를 운영하는 조화순씨는 “사람들이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바다 쪽에서 우르르 뛰어나와서 우스웠는데 나중에 화면에 파도를 넣는다고 하니 신기했다”라고 말했다.

주민 이말숙씨는 영화를 본 후 “동네가 쓰나미에 휩쓸려 없어진 것을 보고 나니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 유령 같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곳 주민에게는 쓰나미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7년 전 태풍 매미가 이곳을 휩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횟집 건물이 부서지고 지하 해수탕은 물에 잠겼다. 배가 육지까지 올라오고 돌이 집안까지 굴러 들어왔다. 상황이 이런데도 장사하는 몇몇 사람 이외에는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태풍주의보가 내리면 주민들은 일단 배를 치우고 대피한다. 이말숙씨의 딸은 영화를 보면서 태풍 피해가 생각나 괴로웠다고 한다.

주민들은 한 달여간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기꺼이 마을을 촬영지로 내주었다. 여기에는 해운대 토박이들의 ‘해운대 사랑’이 있었다. 장두환씨는 “대한 8경 중 으뜸인 1경은 해운대이고, 조선시대 임금님 상에 오르던 어패류는 미포항에서 난 것이다”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영화 속에 가게 이름이 찍힌 라이터가 등장하는 ‘영빈 횟집’의 주인에게 가게가 홍보돼 좋겠다고 하자 그는 “미포가 알려진 것이 제일 좋다”라고 말했다. 쓰나미가 와도 물에 잠기지 않을 고층 아파트 사람들이 집값 떨어진다며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태풍의 상처가 있는 미포 주민은 외지인에게 마음을 열었다.

기자명 해운대·정화 인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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