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말이 또다시 화제다. 계기는 YTN 〈돌발영상〉 ‘살기 좋은 세상’ 편. 지난 6월25일 서울 이문동 재래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의 서민 행보를 담았는데, MB식 화법이 구설에 올랐다.

재래시장 상인들이 한목소리로 “대형마트 때문에 죽겠다”라며 하소연하는데도 이 대통령은 딴소리를 했다. “내가 노점상 할 때는 슈퍼마켓이 없었거든.” “(보좌진에게) 뻥튀기나 사.” 상인들의 하소연이 그치지 않자, 이 대통령은 “요즘은 인터넷으로 하면 웬만한 건 좀 양이 적어도 농촌에서 보내준다. 농촌에도 전부 인터넷이 다 들어가 있어서 개인이 인터넷으로 하면(주문하면) 보내주는데 시장에는 안 보내주겠느냐?”라며 직거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은 “그런데 여러분은 그렇게 안 하고 가까운데서 떼어다 팔려니까”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내가 옛날 젊었을 때, 재래시장 노점상 할 때는 이렇게 만나서 얘기할 길도 없었다. 끽 소리도 못하고, 장사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죽고 뭐 이렇게 모여 하소연할 데도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이야기할 데라도 있으니 좋잖아?(웃음) 좋아졌잖아, 세상이.”라고 말했다.

동영상을 본 누리꾼들은 이 대통령에게 ‘생까선생’ ‘무시의 달인’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줬다. 또 “내가 젊어서 노점상 할 때는”이라는 대목에 주목한 누리꾼 중 일부는 이 대통령의 ‘나도 한때’ 발언을 죄다 찾아내기도 했다.

‘각하’의 직업은 온 세상

“나도 한때 철거민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철거민과 비정규직의 입장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2009년 2월12일 한나라당 청년위원회 만찬)

“나도 창업했던 소상공인(출신)이다. 선배로서 얘기하자면 무엇보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2009년 4월9일 소상공인 교육생과 만남)

“내가 어린 시절 노점상을 해봐서 여러분 처지 잘 안다.”(2008년 12월23일 서민 초청 연찬)

“학생 때 나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통을 겪었던 민주화 1세대이다.”(2008년 6월11일 중소기업성공전략회의)

“나도 체육인이다. 15년간 수영연맹 회장을 했고 세계체육연맹 집행위원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2008년 8월26일 베이징 올림픽 선수단 초청 오찬)

“나도 기업인 출신으로서 아세안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한 적이 있다.”(2009년 5월31일 한·아세안 최고경영자 정상회의)

‘나도 한때’ 시리즈를 발굴한 누리꾼들은 ‘위대하신 가카(각하)의 직업은 온 세상이냐’며 비꼬았다.

말에는 삶의 굴곡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말 속에서 콤플렉스를 찾기도 하고, 정치학자는 정치인의 말 속에서 리더십의 특징을 찾아낸다. 그럼 ‘나도 한때’를 입에 달고 다니는 MB의 말 속에는 어떤 심리가 담겨 있는 것일까? 그 속에 담긴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일까?

MB 화법은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집약된다. 상대방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 말을 많이 하고, ‘나도 한때’를 입에 달고 살 듯 자신의 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 두 가지 특징에서 ‘자수성가한 권위적인 아버지’ 심리와 리더십을 읽어낸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4월11일 대통령 후보 시절 두바이에 있는 현대중공업 화력발전소를 찾아 정주영 전 회장의 사진을 보고 있다.
일찍이 ‘나도 한때’ 화법에 주목한 전문가가 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2005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나도 한때’ 화법 속에 담긴 심리를 ‘자뻑 권위주의’라고 분석했다(〈사람 vs 사람〉). “이 시장이 습관처럼 내뱉는 수식어가 ‘그거 내가 경험해봐서 다 안다’이다”라며 이 말 속에는 ‘천하의 명박이가 이 나이에 안 해본 게 어디 있고 모르는 게 뭐 있겠나’라는 심리가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밥을 굶기도 해봤고, 달동네에도 살아봤고, 고학도 경험했고, 사회 밑바닥 중 안 해본 일도 없고, 데모하다 감옥에도 다녀왔고,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도 역임했고, 안 가본 나라도 없고, 국회의원도 해봤고, 테니스·클래식·발레 감상 같은 취미생활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미국에서 공부한 적도 있고, 종교적 봉사활동도 해봤고”, 그야말로 세상만사 다 겪었고 부와 명예와 권력까지 거머쥔 그이기에 ‘자뻑’에 사로잡혀 이 대통령은 가난이나 어려움을 공감하는 게 아니라 이를 극복한 자기 스토리에 감격하고 공감한다고 정씨는 분석했다. 정씨는 이를 ‘백미러 없는 불도저의 자신감’이라고 정의했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자뻑’의 원인을 착각에서 찾았다. 황 교수는 “이 대통령의 성공신화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는데, 그게 다 빠지고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성공했다고 착각한다”라고 말했다. 이 착각이 권위적인 리더십을 일으키고 소통을 막는다고 황 교수는 진단했다. 황 교수는 “현재를 자기 틀 속에 집어넣고 정리하고 해석하고 이해한다. 문제는 과거에 경험했던 현실과 지금 현실이 다른데도 과거 경험 틀에 우겨넣어 현재를 해석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청년 실업에 접근할 때 ‘나도 한때’ 의 오류가 드러난다. 이 대통령이 말하는 청년 실업 해법이다. “극히 일부 젊은이들은 임시직으로 일할망정 지방 중소기업에 취업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도전해보지 않은 사람보다 실패하더라도 도전하는 사람에게 더 큰 희망이 있다. 세상에 경험만큼 좋은 스승이 없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은 잊지 않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어간다. “저도 역시 그랬다. 나중에 최대 기업이 됐지만 종업원이 불과 90명 남짓한 중소기업이었다.”(2008년 12월1일 4차 라디오 연설)

권위적인 아버지 리더십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라는 식의 대화로 청년 실업에 시달리는 20대와 소통할 수 있을까? 20대 칼럼니스트 김현진씨는 이를 두고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아버지 스타일’이라고 꼬집었다. 권위적인 가부장 스타일은 이문동 재래시장 현장 방문에서도 반복된다. ‘나도 한때 노점상 하면서 학비 벌어 성공했는데 노력만 하면 나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심리가 은연중에 깔려 있는 것이다. 결국 어려움을 겪었던 동질감은 사라지고 자신의 성공 신화만 남는다.

자기 경험의 일반화로 상징되는 권위적인 아버지 리더십은 이 대통령처럼 청소년기에 보릿고개를 겪었으면서도 성공한 60·70세대의 특징이라는 지적이 있다. 황상민 교수는 “60·70 세대 가운데 이 대통령처럼 회사에서 임원 이상을 해본 사람은 자기 경험과 체면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 세대는 어떤 현상을 접할 때 자신의 경험을 덧칠해 해석한다.

황상민 교수는 60·70세대 가운데 이 대통령이 유독 ‘나도 한때’ 화법을 반복하고 집착하는 데는 ‘왕회장’ 정주영 회장의 영향이 있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정 회장은 현대왕국의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정 회장이 아랫사람을 ‘박살’ 낼 때마다 했다는 “채금자(책임자) 해봤어?”라는 말은 지금도 유명하다. 이론이나 논리보다는 경험을 중시한 셈이다. 이 같은 정 회장의 스타일이 현대에 뼈를 묻다시피 한 이 대통령에게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고 황 교수는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국정 운영자로서 자기 경험을 곁들여 말하는 데에는 장점도 있다고 지적한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근무한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대통령에게 올라오는 보고서 대부분이 탁상공론 수준이다. 학자나 정책 입안자들이 추상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통령이 경험에서 우러난 실물을 짚어주면 훨씬 살이 붙어 정책이 현실성을 띠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최 소장은 “문제는 주관적이고 즉흥적이고 합리성이 결여된 옛날 경험을 곁들일 때이다. 흔히 성공한 사람들이 겪는 오류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한때’ 화법보다 더 문제는 특유의 본심 감추기 화법이라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면 대운하 건설 포기 발언 같은 경우이다. 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임기 안에 대운하 건설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시민단체 등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확언해도 의심을 거두지 않는 데는 특유의 화법도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운하를 포기한다면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대운하가 필요하다는 믿음에는 지금도 변화가 없다”라고 말해버리는 식이다(2009년 6월29일 18차 라디오 연설). ‘위’에서 안 한다고 했지만 아랫사람들은 말 속에 담긴 의중을 파악하느라 갈팡질팡하다 간혹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황상민 교수는 “이 대통령은 본심을 감추려고 감춘 게 아니라, 항상 누군가(정주영 회장)에 의해 규정된 상황에서 의미를 파악해 해결하는 게 내면화되었다”라고 분석했다.

“광장 열고 말길 열어야 진정한 소통”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화법이 최근 들어 개선되는 조짐을 보인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이 대통령은 최근 라디오 연설에서 ‘힘겨운 서민 생활에 대해 하소연한 조민정씨와 이록씨 등 많은 분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도 잘 읽었다’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호명하며 공감대 화법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최근 강화한 서민 행보는 레임덕을 지나 데드덕에 진입하는 단계를 막기 위한 몸무림이자 국정 변화이다. 점진적으로 소통의 방식도 나아질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황상민 교수는 “국민은 여전히 대통령 말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어야 소통이 된다”라고 말했다. 법과 원칙 같은 정답만 말하지 말고 감성을 자극하라는 주문이다.

이 같은 소통 기법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처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치 컨설턴트 정창교씨는 “대통령은 옛날에는 끽 소리도 못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어 좋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미네르바처럼 말 한번 잘못했다 잡혀가기도 하는 세상이다. 광장을 열고 말길을 열고 언론 자유를 보장해야 소통이 원활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