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자료9월13일까지 뉴욕 맨해튼에 체류하던 신정아씨의 최근 모습.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를 뉴욕 맨해튼에서 처음 만난 것은 지난 8월11일(토요일) 오전 11시였다.  〈시사저널〉 문화부에서 기자로 일하던 1997년 늦가을, 금호미술관에 새로 부임한 큐레이터라고 인사를 나눈 뒤 첫 만남이었다.
신씨는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각종 매체를 통해 얼굴이 많이 알려진 데다,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한국 사람에게 사진을 한 번 찍혔던 터라 주변을 몹시 경계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온 신씨는, 숙소 바깥에 나올 적에는 늘 착용한다고 했다. 간단한 안부를 물은 다음, 이야기는 그녀의 ‘사건’으로 넘어갔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슈는 학력 위조 문제에 머물러 있었다.

신씨는 한국 미술계의 전반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자신과 관련된 화제를 별 망설임 없이 끄집어냈다. 나는 준비해간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고 메모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에서 제기하는 각종 의혹들에 대해 완강히 부인했다. 논문 표절 이외에는 어느 것 하나 인정하지 않았다.

오후 4시가 넘어서, 나는 만나자고 청한 이유를 밝혔다. “〈시사저널〉 기자들이 독자들의 성원을 받아 새로운 잡지 〈시사IN〉을 창간한다. 신정아씨와의 인터뷰를 9월 중순에 나오는 창간호에 싣고 싶다.”
한국 특파원들이 공항에서 놓친 신정아씨를 찾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뉴욕을 샅샅이 뒤진다는 소문이 나돌던 상황이었다. 신씨는 “지금은 안 된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고, 변호사를 고용해 찾는 중이다. 증빙서류 없이 이야기를 하면 나는 또 거짓말쟁이가 된다. 증거가 나오면 그때 보자.” 그녀는 한국 언론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드러냈다. 알고 지내던 기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연락하라고 이메일을 보내오지만, 이제는 열어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튿날, 나는 〈시사IN〉 기자들이 〈시사저널〉 시절 파업을 하면서 펴낸 단행본 〈기자로 산다는 것〉을 뉴욕에서 구했다. 그것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같은 시간에 멕시칸 식당에서 그녀를 또 만났다. 두 번째 만남도 전날에 이어 또  5시간을 훌쩍 넘겼다.

8월 말, 이번에는 신정아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상황이 자기가 주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으며, 가족이 너무 괴롭힘을 당해 인터뷰를 통해 입장을 밝히고 싶다고 했다.

9월2일 오전 11시, 어느 건물 회의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20일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잠도 못 자고 식사를 제대로 못한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 눈이 무서워 한국 식당에는 아예 가지도 못하고, 일반 식당이나 거리에서도 검은 머리가 보이면 급히 나오거나 걸음을 빨리 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동안 미국의 로펌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변호사팀을 고용해 학교를 졸업했다는 증거를 찾아달라 의뢰하고, 교회에 자주 들러 기도를 많이 했다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 뉴스를 잘 알고 있었다.
정식으로 인터뷰에 들어가면서, 나는 5년 만에 전에 쓰던 아날로그 녹음기를 사용했다. 신씨는 새로 구입했다는 디지털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커피와 빵을 앞에 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공식 인터뷰는 오후 7시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에도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는 계속되어 밤 11시에 끝이 났다. 신씨는 “내 생애 가장 오래 한 인터뷰”라고 했다.  8월의 사전 인터뷰까지 합치면 모두 22시간이 걸렸다.

9월10일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대한 검찰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새로운 의혹이 불거지면서, 신씨와 하루 두세 차례 연락을 취했다. 9월12일 〈중앙일보〉에 자신의 인터뷰 기사가 실리자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평소 친분이 있는 해당 기자가 자신의 집에 울면서 전화를 했었노라고 이메일을 보내왔기에 전화를 했던 것인데, 서로 울면서 통화를 했는데 그렇게 기사가 나왔다고 말했다. 신씨는 지난 9월13일 〈문화일보〉에 자신의 사진이 실리자 더욱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합성 사진에 불과하며, 그 경위에 대해 국내 한 언론사 기자가 알고 있다고도 했다. 
다음은 뉴욕에서 신씨를 직접 만나 가진 인터뷰와, 그 이후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주고받은 질문 및 답변을 정리한 내용이다. 신씨는 현지 시각으로 9월13일 오전, 7월 말부터 묵고 있던 뉴욕 맨해튼 세인트 카를로스 호텔을 떠났다. 독자들의 궁금증에 답하기 위해 최근 주고받은 대화부터 정리한다(인터뷰 전문은 홈페이지(www.sisain.co.kr)에 게재될 예정이다).

누드 사진이 실렸다. 어떻게 된 건가. 
작은오빠가 전화해서 미친년이라고 하더라. 〈문화일보〉에 관해서는 법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 나는 누드 사진이라고는 찍은 적이 없다. 2006년 봄 갤러리인에서 사진가 황규태씨의 사진전이 열렸을 때, 그 전시 도록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갤러리에 갔더니 합성사진이 여럿 있는데, 유명 연예인의 얼굴에 피에로의 몸을 합성한 것도 있고, 내 얼굴에 가슴이 엄청나게 큰 백인 여자의 몸을 합성해놓은 작품도 있었다. 작가의 의도가 관람객의 흥미를 자극하고 그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라고는 하나, 이건 아니다 싶어 명예훼손 소송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떼라고 했다. 그 일에 대해 아는 기자와 농담도 주고받았다. 합성이 분명한데,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번 사진의 유출에 누가 개입되었는지 짚이는 바가 있다(*신씨가 실명을 말했으나 생략).

지난 9월10일 검찰이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부적절한 관계’라고 밝혔다. 
절대로 그런 사이가 아니다. 섹스 스캔들로 몰고 가려 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다. 동거라니, 말도 안 된다. 

이메일은 언제부터 주고받았나?
 알게 된 것은 성곡미술관으로 옮긴 직후인 것 같은데 (신씨는 2002년 4월 성곡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 그 정도 숫자의 이메일을 썼다고 하면 많은 것은 아니지 않나.

 

 

이메일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나?
전시에 관한 이야기, 안부 인사. 진짜 연인 사이였다면 이메일 주고받지도 않았을 거다. 더 조심하겠지.

변 실장과 연인 사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왔다고 한다. 서로 그림을 그려주었다는데.
대학 졸업 후 단 한번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변 실장님이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을 봐달라고 해서 봐준 적은 있다. 그것도 나를 그린 것은 아니다.

보석을 선물로 받았다는데.
그림을 선물로 드린 적이 있다. 그림 값을 돈으로 주겠다고 해서 극구 사양했다. 그랬더니 돈 대신 목걸이를 준 것이다.

청와대에 들어간 사실은 있나·
두 번 들어갔다. 문화 쪽을 담당한 여성 비서관이 구경을 시켜주신 적이 있고, 변 실장님 방에 그림을 디스플레이해준 적이 있다. 비서관이 부탁을 해서 전문업체 동부아트 직원 두 사람과 일요일에 가서 그림을 걸었다. 그때 실장님은 안 계셨다.

그분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건가.
예일대 동문회에서 몇 번 보았다. 박성용 회장(금호그룹 명예회장, 예일대 한국총동창회 회장, 작고)님과도 한두 번 보았다.

검찰의 가택 수색에서 확실한 물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없다. 증명사진은 한두 장 있을 거다. 명함에 사진 넣는 게 유행할 때 명함 디자인 해보라고 해서 갖고 있었다.

왜 지난번 인터뷰(9월2일)에서는 그분과 알고 지냈다고 얘기 안 했는지.
누구를 알고 지낸 것 자체만을 두고도 외압이 있다고 하지 않나.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다 보니, 누구를 안다고 말을 못 한다. 지금도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지지 않았나. 

(이하 9월2일 인터뷰)
뉴욕에 온 지 2개월 가까이 되어간다.  한국에서 수습하지 왜 이곳에 와 있는가·
내 입장에서는 학력 문제가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팩스도 내가 조작했다고 하고, 내가 말하는 모든 걸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나. 도망을 온 게 아니라 확인 작업을 하러 뉴욕에 온 거다. 

그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나·
처음 2주간은 숙소 잡아놓고 그 안에서 정신없이 울기만 했고, 그 다음부터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변호사를 만나 정황 파악을 한 달 정도 하고 난 다음, 변호사팀과 계약을 해서 내가 실제로 공부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증거를 찾는 일에 매달렸다.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입학 혹은 중퇴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서울대에는 합격이나 입학을 한 것인가·
서울대에 다녔다고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서울대 시험도 본 적이 없다. 서울대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셔서 대신 유학을 간 거다. 

미국 캔자스 대학에는 무슨 과에 언제 입학했나·
고등학교 졸업 1년 후인 1992년 1월. 미술학과(Fine Art)였다.

캔자스 대학도  3년 중퇴다,  대학원도 안 다니고, MBA도 안 했다고 확인했다는데.
캔자스 대학이나 예일 대학 문제는 변호사가 확인 작업을 하고 있으니 결과가 나오면 변호사를 통해 밝히겠다. 캔자스 대학은 1992년에 입학해서 1996년 5월에 졸업했다. 1994년 9월 학기에 MBA를 시작해 학부와 MBA를  4년6개월 만에 끝냈다. 변호사들이 확인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 서울에 가서 변호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히겠다.

집이 청송이라면 시골인데, 그렇게 잘살았나.
할아버지가 사업하다가 중간에 정리하고 청송에 내려가셔서 노후를 보냈다. 아빠가 당시에 택시회사와 주유소를 하셨다. 1970~80년대에는 엄청났다. 직장 생활하면서도 어머니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시고, 필요한 돈을 보태주셨다.  BMW 자동차도 스님 이름으로 되어 있다. 보험료나 자동차세, 주차위반 요금 같은 것을 일절 신경 쓰지 말라고 내 이름으로 하지 않은 거다. 집에서 다 알아서 해준다.

어째서 BMW 자동차가 스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나. 어머니 이름도 아니고·
 어머니가 다니시던 절의 스님이라고 들었다. 그 스님이 BMW를 한 대 사셨나 본데, 스님 입장에서 타기가 힘들고, 돈 갚을 능력도 안 되니까,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가 시주하는 셈 치고 그 차의 돈을 대신 내주시고, 또 다른 차를 사드렸다고 한다. 그 차를 올케한테 주려고 집에 갖다 놓으셨는데 내려갔다가 내 차(소나타)를 두고 그냥 타고 온 거다.

보통 쓴 어느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면, 졸업한 사실을 가장 빨리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본인이다.
그거 다 했다. 2005년 9월 동국대 들어갈 때 다 했다. 

예일 대학은 언제 들어갔나·
원래 1997년 가을에 들어가는 걸로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아버지가 1994년에 돌아가시고, 1995년에 삼풍 사건 겪고, 1996년에 캔자스를 졸업했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좀 쉬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10월에 아버지 제사도 있고 해서 1997년 들어갔다가 갑자기 금호미술관에 취직이 되었다. 1998년에 다시 입학하는 걸로 미뤘다가  포기했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2000년에 다시 지원했다. 당시 인터넷으로 공부하는 게 알려진 상황이었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2000년에 지원해서 2001년 1월부터 다닌 거다. 입학 허가서를 받는 데 미술관 현직 큐레이터라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는 왜 들어갔나.
전시기획을 하다 보니 공부를 좀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호미술관에서도, 성곡미술관에서도 일을 거의 나 혼자 도맡다시피 해 집에 가서는 피곤해서 자기 바빴다. 갈수록 머리가 비어가는 것 같았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면 책이라도 보지 않을까 생각했다. 졸업할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고, 인터넷으로 하고, 또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원 한번 해보자고 했는데, 입학 허가서가 왔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다.

예일 대학 박사 논문이 표절된 걸로 판명났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2년(4학기) 코스워크 하고, 2003년 봄에 종합시험 보고, 2004년 가을에 (논문) 디펜스를 하고, 2005년 5월에 졸업했다. 물론 정규 과정으로 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공부를 해서 분명히 마쳤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서 내 공부를 도와주는 가정교사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서울과 뉴욕을 왔다 갔다 하며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 도움을 받으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난 아직 잘 모르겠다. 잘못되었다는 걸 지난 6월6일에 처음 알았다. 이 부분도 변호사들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고 나중에 상세히 밝혀줄 것이다.

박사과정 하면서 남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가·
그런 거는 나중에 변호사 통해서 자세히 밝히겠다.

그 가정교사가 논문을 썼다고 할 수 있나.
처음부터 그 여자가 쓴 건 아니다. 내가 큰 테두리는 잡아줬고, 중간중간에 내용 안 맞는 것 때문에 마찰은 많았지만 (그녀가) 100% 다 쓴 건 아니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버려둬서 그렇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예일 대학에서도 졸업생이 아니라고 하는데.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분명히 입학을 했고, 등록금을 냈고, 수업도 인터넷 통해 받으면서 리포트로 대체했다. 티칭(Teaching)과 큐레이터십은 면제받고, 영어로 강의할 능력이 된다고 인정받았고, 현직 큐레이터이니까.

등록금이 얼마였는지, 기억나나·
한 학기에 1만2천~3천 달러 했던 것 같다. 

본인이 송금했나·
돈은 내가 직접 내지 않았고, 이것도 나중에 얘기하면 좋겠다.

등록금이 예일 대학 은행 계좌로 들어갔나·
이 부분도 나중에 밝히겠다.

그럼 지금 인터뷰에서 확인해줄 수 있는 것은·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학교 다니고 졸업했다는 것. 졸업 가운도 가지고 있다.

졸업 가운? 졸업식에 갔었나·
졸업식에 참석은 못했지만 가운은 가지고 있다.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뉴욕에 가기는 했다. 가운을 한 달 전쯤에 맞춰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은 거다. 빌리는 것도 3주일 전에 예약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해서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주문해서 졸업 가운을 받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예일 대학에서는 졸업자 명단에도 없다고 한다. 졸업식 때 배포한 인쇄물에도 이름이 없다고.
만약 지금 이야기 나온 대로라면, 내가 아무리 돈이 남아서 펑펑 쓴다 하더라도, 온갖 이야기를 다 들으며 여기 와서 변호사까지 동원해 이 짓을 안 할 것이다. 이 와중에 더 이상 내가 숨기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나. 내 인생 자체가 끝났는데. 뭘 하겠다고 뿌득뿌득 우기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지 않나.

그럼 지금 인터뷰를 하는 이유는·
서울에서 나와 관련해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때문에 내 입장을 밝히려는 거다.

동국대에서 확인 요청을 했고 예일 대학에서 답신 팩스를 보내줬다는데, 사인을 했던 사람이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내가 확인 요청을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받은 것도 아니니까, 내가 말할 게 아니다. 나는 (동국대가) 그것을 확인한 줄도 몰랐다. 누가 사람을 조회할 때, 내가 너 조회한다고 말하나. 

동국대에서 확인 팩스를 보낼 당시 신정아씨가 외국에 나가 있었다면서, 그것 때문에 당신에게도 혐의를 두고 있던데.
나는 동국대에 임용된 지 이틀 만에 사표를 냈다. 사표를 쓰고 외국에 나온 사람이 어떻게 동국대에서 팩스를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알겠나. 그리고 예일 대학은 아무나 들어가서 팩스를 받고 보낼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지 않나.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식 할 때 졸업장을 받는다. 졸업을 했다면 그 철인이 찍힌 졸업장을 다 가지고 있을 텐데.
그거 다 제출했다. 동국대 들어갈 때.

철인이 찍힌 졸업장을? 동국대 들어갈 때? 캔자스 대학 예일 대학 졸업장 모두?
동국대에 다 제출했다.

졸업장 원본이 동국대에 있다는 건가·
분실했다고 한다.

동국대에서 받은 사실은 있는데 분실했다고 하나·
내가 제출한 졸업장을 받은 사람이 있다. 지금 학교에서 한두 사람 주장하는 분들이 내가 서류도 제대로 안 내고, 총장이 밀어붙여서 이렇게 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서류를 다 내고 들어갔다.

학력이 문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나.
지난 6월6일에 논문 표절 제보가 학교에 들어왔는데, 나는 내 논문이 표절된 것인 줄도 몰랐다. 동국대 미술학과 교수가 학교에 제보를 했다고 한다. 스님이 정보를 주셔서 제보를 했단다. 표절한 사실을 알았으면 졸업 논문을 남들에게 돌렸겠나. 내용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남의 도움을 받아 논문을 썼기 때문에, 그것 자체만으로도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월25일자로 사표를 내고 뉴욕에 왔다. 논문 표절이면 학위가 취소되지 않나. 그런 경우에는 본인에게 통보를 해주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 하니까.

금호미술관 이야기를 좀 해달라.  4년 동안 일한 걸로 기억한다.
1997년 12월1일에 입사해서 2001년 12월31일까지. 만 4년이다.

신정아씨가 예일 대학 가짜 학생이라고 밝혀져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박성용 명예회장이 당시 예일 대학 총동창회장이었는데, 그 사실이 알려져서 쫓겨났다고 하는데. 금호미술관이 신정아씨가 성곡미술관에 채용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 문제를 키웠다고도 하던데.
전혀 아니다. 금호미술관에는 미술과 음악 파트가 있다. 회장님이 음악을 좋아하셨으니까. 음악 쪽에서 재량권을 행사하시던 상무가 있었다. 여자 분이다. 미술은 회장님 동생인 박강자 관장님이 담당하셨고. 미술과 음악 파트 사이에 마찰이 종종 있었다. 미술관이 2002년 1월부터 대관, 곧 작가들에게 돈 받고 빌려주는 곳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내가 그만둬서 대관이 된 줄 아는데, 대관이 결정나서 내가 나온 것이다. 대관만 하면 큐레이터가 필요없으니까. 바로 그 모 상무가, 신정아가 어떻게 서울에서 예일 대학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박사과정 공부를 할 수 있느냐, 분명히 거짓말일 거라고 회장님께 얘기했고, 회장님은 관장님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나중에는 회장님이 예일 대학에서 온 서류까지 다 보시고, 관장님을 통해 의심해서 미안하다고까지 말씀하셨다.  회장님도 직접 확인해보신 거다.

성곡미술관에서는 언제 시작했나.
일은 2002년 3월15일부터 했고, 정식 입사는 4월1일이었다. 성곡은 그전부터 제안을 해왔다.

성곡미술관에서는 어떤 전시를 주로 했나. 미술계의 어떤 사람들은 해외에서 만들어진 전시를 돈 가지고 사왔다고 하는데.
해외 전시는 다 만들어진 것을 사온 적이 없다. 2~3년씩 공을 들여서 가져온 거다. 전시 대여비 한번 내본 적 없다.

어떻게 무료로 빌리나.
나는 큰 전시들을 기획할 때, 최소한  2~3년은 걸린다. 미국 작가 척 클로스 전시도 내년 3월에 기획해놓았는데, 내 방식이 있다. 작가 전시를 보고 작업실에 찾아가고 해서 오랫동안 인간적으로 교류한다. 일본계 미국 작가 마리코 모리 전시도 내년에 하기로 되어 있는데, 직접 만나 설명해서, 내가 이 사람을 통해 전시를 해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거다. 외국 작가들은 한두 번 전시를 하면 입소문을 좋게 내준다. 도와주기도 한다. 지난해 여름 〈존 버닝햄 전〉에는 성곡미술관 사상 가장 많은 7만명이 왔다. 입장료 수익만 2억9천3백만원이었다. 존 버닝햄 작품도 영국에 가서 설득해 들여왔다.   성곡미술관에서 또 하나 얘기할 게 펀딩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내 뒤에 있는 누가 봐줘서 한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니다.

그러면 기업으로부터 협찬은 어떻게 받나·
〈뉴욕의 다국적 디자이너 전〉을 할 때 처음 받았는데, 그것을 하려면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한다. 기업의 담당 실무자들에게  미술관 초대권을 줘서 가족과 함께 오게 하고, 회사 복도에 걸려 있는 작품도 바꾸어주고, 달력 자문도 해주고, 달력에 들어갈 작가 작품도 싸게 섭외해주고, 텔레비전 광고 만드는 데도 도움을 주고…. 한 번 접촉을 하면, 끊지 않고 지속해서 관계를 유지한다. 가끔 회사에 가서 특강도 해준다. 개인적으로 특강료를 받는 게 아니라 전시할 때마다 협찬을 많이 받는다. 전시기획을 하다 보면 돈 문제에 많이 부딪힌다. 자꾸 회사 돈 축내면서 할 수는 없고, 다른 회사에 펀딩하면 그 회사 이미지도 좋아지고, 그 사람들도 와서 자기네가 후원한 전시니까 재미있게 본다. 사람들은 내가 오너들한테 아부 잘해서 전임자들 쫓아내고, 마당발이라서 이렇게 펀딩하고, 또 펀딩을 하는 데도 배경이 있지 않냐고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렇게 하는 데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연이은 미팅 때문에 화장실 가고 싶은데도 참아야 했던 적이 많다. 주말에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미술관은 월요일이 휴일인데, 2005년부터 동국대에 가면서  주로 월요일에 강의를 몰아서 했다. 그전에도  이화여대, 홍익대, 중앙대, 국민대, 상명대에서 강의했다.

언제부터 했나.
정확하게 기억 안 나는데 2001년~2002년부터 한 것 같다.

동국대에서 교수직 제안받은 게 언제인가.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았나.
2005년 5월 (예일 대학) 졸업하고 나서, 전임 제안을 해온 곳이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였다.

서울대에서? 전임 자리를?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에서 각각 연락이 왔는데, 중앙대에서는 교무처에서 교수 채용이 있다고 전화만 두 번인가 왔었고 서울대는 당시 정운찬 총장께서 연락을 해서 뵙게 되었다. 그때 삼성에서 펀딩받아서 서울대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있었다. 관장 추천을 받는 중이었는데 내가 그 한 사람이었나 보다. 교수를 겸하는 자리다. 미국 유명 대학들처럼 서울대미술관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그와 관련해 그분을 몇 번 뵈었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성곡을 갑자기 그만두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과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가, 그 상황에서 나에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서울대는 국립이지 않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하는 것 보니까 나올 때 외출증도 써야 하고 보통 복잡한 게 아니더라. 나는 그렇게는 일을 못하는 스타일이다. 학교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절실한 상황이 아니었다. 서울대는 접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어서, 정운찬 총장님께 정형민 교수를 추천해드렸다. 내가 추천한 것만으로 된 것은 아니겠지만 정형민 선생님이 지금 미술관장으로 계신다. 여러 분의 추천을 받았을 것이다. 그후 동국대에서 연락이 왔다. 동국대는 그 다음해가 개교 100주년이었는데, 100주년을 앞두고 여러 사람을 특별 채용하던 중이었다. 동국대는 문화예술 쪽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뜻이 있었고, 미술경영학과 같은 데 관심이 많았다. 8월 초에 동국대에서 연락이 와서 지원했다. 동국대에서는 나를 학자로 뽑으려 한 게 아니라 실무 능력을 평가해서, 필드와 학교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의뢰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런 쪽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성곡미술관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래서 8월 초에 나와 관련된 캔자스 주립대, 예일 대학의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다 제출했다. 서류 미비라고들 하는데, 일반적으로 성적증명서는 안 떼가지고 있다. 성적증명서는 공공기관에 안 들어가면 낼 일이 없으니까. 가져오라고 해서, 예일 대학과 캔자스 대학에 요청을 해서 그것을 받아 제출했다. 학교 졸업증명서 복사본을 인사과에 다 제출했다. 인사과 임 아무개 계장에게 제출했고, 8월 중순에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갔다. 지금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홍기삼 총장님을 면접 때 처음 뵈었다. 8월30일 계장이 이사회에서 통과되었다고 연락을 해왔다. 당시 불교미술사학과에 교수가 한 분 돌아가셔서 자리가 비었다. 나와 관련된 과가 신설될 예정이었고. MBA 과정의 미술경영학과를 추진 중이었다. 학교에서는 다른 과로 갔다가 과가 신설되면 옮기는 일을 많이 한다.  인사과에서 불교미술사학과로 들어갔으니, 학과장이면서 박물관장인 정우택 교수께 인사하라고 하더라. 또 서류 원본을 챙겨달라고 했다. 8월30일에 그 전화받고, 31일 학교에 갔다. 정우택 교수를 만났더니, 불교미술사학과에는 다른 선생을 뽑아야 하니, 내가 강의를 할 수 있는 다른 학과로 빨리 옮겨가라고 했다. 인사하러 갔다가 엄청 혼이 난 거다. 왜 남의 과에 왔냐 이거다. 그래서 나는 100주년 때문에 들어와서 과가 생기면 최대한 빨리 옮기겠다고 했다. 미술학과 오원배 선생은 ‘미술학과에서 7년 강의한 사람을 교수로 쓰고 싶었고, 이론하는 사람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미술학과에 오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어차피 전공이 이쪽이니, 나중에 미술학과로 보내질 거라고 했다. 순수하게 학교 발전을 위해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지원해 들어갔는데, 가까운 분들부터 나를 거북스러워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서 일을 해서 뭐 하냐, 내 본업은 미술관 전시기획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인사과에서 학술진흥재단에 박사 신고를 했냐고 물어보았다. 5월에 졸업해서 그런 거 잘 모른다고 했더니, 성적증명서가 도착했느냐고 묻기에 받았다고 물으며 성적증명서 원본 하고 학위증 원본 다 갖고 오라고 했다. 교육부에 신고해야 한다고. 호봉 이런 거 때문에. 8월31일 정우택, 오원배 선생한테 인사를 가면서, 그 원본 자료를 다 들고 인사과에 갖다 줬다.  나중에 서류 절차 마무리하고 금방 돌려준다고 해서, 그걸 복사도 안 해놓고 드리고 왔다. 성적증명서는 그때 처음 받았으니까 복사할 새도 없었다. 받자마자 우표 붙은 채로 그대로 갖다 줬으니까.

학위증은 졸업장을 얘기하는 건가· 액자에 든 거?
맞다. 액자에서 빼서 갖다 줬다.

캔자스 대학의 학부와 석사, 예일 대학 박사, 성적증명서와 학위증을 동국대 인사과에 모두 갖다 줬다고·
일단 이렇게 제출했다. 교육부와 학술진흥재단에 신고 안 했으니 다 갖고 오라고 해서. 검증 과정만 마치면 금방 돌려준다고 했다. 확인 작업 하나 보다 하고 갖다 드렸고, 정우택·오원배 선생 뵙고 나서, 이게 아니다 싶어서 9월2일 사표를 냈다. 임용된 지 이틀 만에 사표를 냈으니 얼마나 서글펐겠나. 그로부터 며칠 있다가 외국에 나와버렸다. 외국에 나왔더니 인사과에서 이메일을 보냈더라. 

그 이메일 가지고 있나·
다 가지고 있다. 외부에서는 내가 학교 들어가고 싶어서 환장이라도 한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학교 관련 이메일을 안 버리고 가지고 있다.  이분들이 내게 연락을 해와서 학교에서는 휴직 처리하라고 하니, 첨부 파일로 보내는 휴직계 서류를 작성해 보내라고 했다.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전했다. 이때쯤에 학교에 교양과목을 전담하는 교양교육원이 생겼다. 국문학과 황종연 교수가 원장을 맡게 되면서 한 두 번 전화했다. 교양교육원에서 교양과목을 전담해보라고 연락을 했다. 가을쯤에 안 한다고 거절을 했는데, 12월에 성곡미술관으로 찾아왔다. 미술사 하고 시각예술과 시각문화 같은 미술 과목을 해보라고 해서, 3월에  교양교육원 조교수로 복직했다. 그 이후 2006~2007년 강의 열심히 했고, 강의가 학생들에게 인기도 있었다. 

강의는 몇 개였나.
한 학기에는 3개, 한 학기에는 2개 하고. 조교수 책임 학점이 있다. 

강의는 2006년 3월부터 2007년 봄학기까지 했나.
6월 중순에 학기 마무리하고 25일 사표냈다.

신정아씨가 동국대 들어갈 때 어떤 유력한 배경이 작용한 것 아닌가. 장윤 스님도 이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장윤 스님이 이사회에서 처음 문제 제기한 것은 2007년 2월이다. 들어갈 때는 아무 문제 없었다.

캔자스 대학 학부 대학원 MBA, 예일 대학 학위증을 모두 제출했는데 동국대에서는 어디 있다고 하나.
분실했다고 한다. 나한테 분실했다고 얘기했다. 2007년 2월 내가 미국에 있을 때인데 황종연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서울 가서 만났더니 2월 이사회에서 장윤 스님이 이사회에서 신정아가 가짜 박사라고 얘기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학교에서 나를 채용할 때 공식적으로 확인 절차를 다 밟았는지 확인해봤더니 다 밟았더란다. 당시 교무처장이셨던 이상일 본부장님이 오셔서, 검증 작업한 부분에 대해서 다 얘기하고, 확인 서류를 보냈던 사람은 안 아무개씨인데, 그분들이 가서 나에 대한 검증 작업을 설명해 이사회에서 마무리되었다고 하더라. 황 선생님이 혹시 논문이나 학위증이 있느냐고 해서 ‘학위증 원본을 인사과에서 내라고 해서 냈는데 안 돌려줬다’고 했더니 ‘왜 안돌려줬냐’고 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바로 임 계장에게 전화했더니 찾아보겠다고 그러더라. 황종연 선생님이 논문하고 학교 졸업한 증명서 복사본이라도 볼 수 있느냐고 해서, 보여드렸다. 그랬더니 ‘아무 문제 없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4월에 오원배 선생이 교수협의회에서 사람 만나면 신정아씨가 예일 대학 졸업자 명단에 없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얘기해줘야 하냐고 해서 나에게 얘기하라 하고, 논문 제목과 지도교수 이름을 다 적어줬다. 5월29일 장윤 스님이 학교 이사회에서 해임을 당했는데, 해임당하신 건 내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내 문제는 명예훼손으로 조금 포함되어 있었고, 당시 학교 고발 문제 같은 게 있었나 보더라. 6월6일 오원배 선생이 나의 논문 표절 문제를 학교에 제보한 거였다. 그때 오 선생이 제보한 서류를 보니, 오 선생과 서울대 교수 3명이 예일 대학에 확인을 요청한 서류더라. 언론에 도는 서류가 바로 이거다. 나는 어쨌든 선생 입장에서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 6월20일 성적 다 내고 25일 뉴욕에 나오면서 사표를 제출했다. 그게 다다. 동국대는 5월29일 장윤 스님 해임되기 전에, 2월 이사회에서 문제 제기된 다음, 황 선생님이 나에게 학교에 가서 원본을 찾으라고, 그러고 있는 참에, 교양교육원에서 연락이 왔다.  교무처에서 사본을 달라고 한다고. 내가 화를 벌컥 냈다. 원본 가져가서 돌려주지도 않으면서 또 사본 내라고 그러냐고. 교무처 김 아무개 과장이 달란다는 거다. 그분을 찾아갔다. 내 서류 달라는 게 이번이 네 번째다. 남의 서류 가져가서 다 잃어버렸느냐,  졸업장, 성적증명서 다 찾아내라고 하면서 이 사람과 한판 싸웠다. 다 찾아오라고 했더니,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것이고 서류는 최대한 찾아보겠다고 한 것이 4월이다.

서류를 네 번이나 냈나·
그렇다. 동국대에는 들어갈 때 완벽하게 들어갔다. 절차를 안 거쳐서 채용했다고 하는데, 엄격하고 완벽하게 서류 다 제출하고 정상적 절차 통해서 다른 교수와 똑같이 들어갔지, 특혜받은 거 아무것도 없다.

성 스캔들 문제가 불거졌는데.
한국에서는 독신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정말 어렵다. 언론에서 배후가 권력 쪽에 있다고 하는데 10년 동안 일을 열심히 하면 이 분야에서 당연히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배후에 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싱글이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서 그런 거다. 내가 남자였으면 이러지 않을 거다.

2백40만원 받는 월급쟁이가 뒤에서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BMW를 타고 다니며, 어떻게 명품을 사다가 선물로 돌리며, 호화사치 생활을 하느냐고 하잖나. 그 돈이 어디서 났나.
집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주신다. 평생 먹고 살 만큼 유산도 받았고.

자기 돈이 아니라는 건가.
어머니한테 받았다. 막내 여동생이 시집도 안 가고 있으니, 오빠들도 용돈을 준다.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결혼할 때 쓰라고 마련해주신 돈도 있고. 내 월급은 2백40만원 아니다. 학교하고 미술관 합쳐서 연봉이 1억원 가까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사치를 하려면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개인회생을 신청한 신용불량자라고 확인되었다던데.
뉴욕에 와서, 한국 신문에 기사 난 것 보고 알았다. 

그전에는 본인이 그렇다는 거 몰랐나.
전혀 몰랐다.

신용카드는 썼나.
썼다.

신용카드 몇 개나 가지고 있나.
한국 거 2개(신씨는 카드 4장을 지갑에서 꺼냈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 또 하나는 국내의 직불카드, 나머지 2개는 한국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였다. 2장의 신용카드는 각각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제일은행 First Check 4481 2349 9574 **** VISA 06/10 Jeong Ah Shin’ ‘하나은행 4400 2540 0672 **** VISA Jeong Ah Shin’.

쓰는 데 문제가 없었나.
그렇다.

신용불량자가 이럴 수가 없는데·
기사 보고 깜짝 놀라서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친척들이 보증을 많이 서달라고 했다 한다. 어떤 사업하는 친척 분이 계속 그랬다는데, 시골에 내 이름으로 상속된 땅을 가지고 보증을 섰다고 한다. 어차피 내가 시골에 살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날려도 되니까. 그분이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내 앞으로 빚이 엄청 생긴 거다. 그분 입장에서는 책임은 져야 하고 갚을 수 있는 능력은 한정적이고, 그래서 아마 이런 개인회생 신청해서 하는 게 있나 보지? 내 이름으로 개인회생 신청을 했다고 한다.

개인회생 신청을 남이 할 수 있나?
대리인으로 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나중에 집에서 그 사실을 알고 너무 황당해했다. 이렇게 신청을 하면 공식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는 거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또 문제 삼느냐 하면 현금만 쓴다고. 돈뭉치를 가지고 쓴다고.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서 강조하신 것 중의 하나는 카드는 빚이다, 쓰지 마라는 것이었다. 유학 갔을 때도 안 만들어주셨다. 조르니까 아버지 외환카드를 주시더라. 현금을 주로 많이 썼고. 돈을 뭉치로 들고 다닐 일은 없다. 수표를 쓰니까. 중요한 사람들과 호텔에서 밥 먹을 때는 카드를 썼다.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으로는 어떻게 선정되었나·
논문 표절 문제가 불거져서 6월25일 학교에 사표를 내고 뉴욕에 오지 않았나.  6월26일 광주비엔날레 실무자가 뉴욕으로 연락을 해왔다. 총감독 선정을 원점에 돌아가 선정하기로 했는데, 나만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당시 광주비엔날레는 일정이 굉장히  촉박했다.  보통 3~4월에 감독이 정해져야 하는데 문제가 복잡해져서 정하지 못한 거다.  7월4일 이사회 이전에는 정해야 하는데…. 내가 유럽을 가야 해서 7월6일이나 7일에 들어가서 하겠다고 했더니 4일 이사회 이전에 하든가, 아니면 못한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종상 선생님이 연락을 해왔다. ‘인터뷰할 기회가 왔을 때 얼마나 열심히 전시기획을 하는지 보여줘라. 설사 이번에 안 되면 어떠냐’고 하시면서 인터뷰를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음날 바로 비행기 타고 들어갔다. 7월1일 일요일 아침 10시에 인터뷰를 했다. 이사장님께서 나이가 워낙 어려서 애초부터 내가 배제되었다는 얘기하시고, 혼자만 그렇게 된 것 같아 인터뷰 기회라도 주자고 하셨다고. 나는 인터뷰에서 제 입장을 다 말씀드렸고, 그 다음날 오후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7월3일에는 한갑수 이사장님, 오쿠이 감독과 함께 조찬을 했고, 그 다음날 오쿠이와 미팅하고 비엔날레 이사회에 참석했다. 이사회를 할 때 한갑수 이사장님이 선정 과정을 설명하려고 하자, 이사 한 분이 시간이 지체되니 생략하자고 하시더라. 일단 프리트는 다 나갔으니까. 그 자리에서 질문받고, 어떤 식으로 큰 그림을 그리겠다고 답을 했고, 만장일치로 통과된 거다.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갑수 이사장이 예전에 뭐 하셨던 분인지 아나.
모른다. 그때 처음 뵈었으니까, 인터뷰, 조찬, 이사회 때 뵌 것, 세 번이 전부다. 이사회 일정은 임박하고, 사람은 빨리 선정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인터뷰를 했는데, 내가 마음에 들어서 선정한 거다. 나는 하겠다는 사람도 아니고 애초 3월에 이름이 제외되었던 사람인데, 나만 억울하게 인터뷰할 기회조차 안 준 게 미안하다면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 인터뷰에서 여태까지 한 사람들보다 후한 점수를 받아서 된 것밖에 없다. 물론 그게 이사장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해도, 공식적으로 이사회에서 프리젠테이션 하는 과정을 거쳤다. 베니스 비엔날레 참관 때문에 원래 있던 일정대로 출국했는데, 이사장님께서 베니스로 전화를 하셨다. 장윤 스님으로부터 나에 대해서 제보받은 거, 말씀하시면서 들어와서 공식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해명하라, 그래서 전화 한번 통화한 게 다다.

이사회에 참석한 후 베니스로 출국한 게 며칠인가.
1일 아침에 인터뷰하고,  2일 오후에 총감독으로 내정되었다고 연락받고, 3일 조찬하고,  7월4일 이사회에 참석하고 7월5일에 베니스로 나갔다. 이사회 후 기자 인터뷰 하고 올라오는데 (학력 문제와 관련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나왔나.
〈광주일보〉에서 처음 연락이 왔는데, 동국대에서 예일 대학측에 확인한 서류가 있으니 그걸 광주비엔날레 실무자에게 보냈다. 비엔날레에 그것까지 제출하면서 감독이 될 이유는 없지만 시작부터 찜찜하니까, 연락이 오면 확인시켜주라고.

비엔날레에서 전화 왔을 때 동국대 교수 사표냈다, 이런 얘기는 안 했나.
그 얘기는 안 했다. 사표는 냈지만 당시에 수리가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고 6월25일에 사표 냈고,  26일에 전화받은 거다. 하루 차이여서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에 얘기해도 될 문제였으니까.

학교에서 문제가 생겨 사표를 냈다고 하면 광주비엔날레에서 총감독으로 내정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문제로 학교에 사표는 냈지만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하고 학교 교수 하고는 상관없는 거다.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은 대학교수만 하는 거 아니지 않나.  전시기획자가 하는 거지.

그동안 뉴욕에 있으면서 이같은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지금도 인터뷰하자고 하루에 이메일이 수십 통 오지만  열어보지도 않는다. 내가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은, 유럽에서 서울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을 위조한 거짓말쟁이로 몰렸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러 뉴욕에 왔고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또 거짓말한다고 할 테니 인터뷰하지 않은 거다. 지금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내 가족이 너무 힘들어서다. 특히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신데,  한번은 고열이 났는데 앰뷸런스도 못 불렀다. 기자들 떼내려고 쇼한다고 할까봐. 오빠들과 조카들까지 괴롭힘을 당했다. 심지어 조카는 고모가 가짜 박사라고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왔다고 하더라. 우리 가족들한테만은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을 부탁하려고 이 인터뷰에 응했다. 9월 말이나 10월 초쯤이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은데 마무리되면 바로 서울에 들어갈 거다. 검찰에 가서 조사받을 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최소한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꼭 확인시켜드리고 싶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벌을 받을 거다. 내가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겠나. 이미 끝난 사람인데.

만일 본인이 원하는 대로 결과가 안 나오면 어떻게 할건가.
그대로 결과를 들고 들어갈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은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러 왔고, 변호사들을 통해서 확인된 결과를 가지고 들어갈 거다.

 “변양균 실장님과 절대로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다. 진짜 연인 사이라면 이메일을 주고받지도 않았을 거다. 명함 만들어달라고 주신 증명 사진 한두 장은 나왔을 것이다. 진주 목걸이는 내가 선물한 그림에 대한 답례품이다. 누드 사진은 합성이 분명한데,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이럴 수가 있느냐.”


“예일 대학에 분명히 입학을 했고, 등록금을 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코스워크 하고, 논문 디펜스를 한 뒤 2005년 5월 졸업했다. 내 공부를 도와주는 가정교사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도움을 받으면서 뭐가 잘못되었던 건지, 아직 모르겠다.”

기자명 토론토·성우제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sungwooj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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