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쓰는 관용어가 있다. 예를 들어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 같은 것. 검증 자체가 불가능한데도 그 말이 마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사실인 것마냥 쓰인다. 나는 ‘TV는 바보상자(fool-maker)다’라는 말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TV 시청자를 비하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하고, TV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많다고 느꼈기 때문에 ‘바보상자’라는 비유어를 멀리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문짝이 달려 마치 가구처럼 보이는 TV를 끼고 살던 나에게는 기분 나쁜 말로 여겨졌다. 내가 바보란 말인가.

TV는 오랫동안 나의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맞벌이를 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운동이나 딱지치기 같은 잡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줄곧 TV에 매달렸다. 〈짱가〉 같은 만화 영화를 섭렵했다. 명절에 가족들이 친척 집에 간다고 하면 TV에서 하는 만화를 봐야 한다고 혼자 집에 있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우리 아들은 학교도 가기 전에 TV를 보면서 한글을 깨쳤다’고 말한다. TV를 많이 봐서 프로그램을 외워 한글을 줄줄 읽었나보다. 이쯤 되면 TV를 ‘한글 스승’이라고 해야 하나.

이러니 처음 TV 끊고 살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회사 선배가 제안했을 때 잠시 고민할밖에. ‘아, TV는 내 친구인데….’ 바로 얼마 전만 해도 퇴근한 이후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는 〈1박2일〉을 틀어놓고 낄낄거리면서 보았고, 휴일 에 프로야구를 틀어놓고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것을 ‘30대 직장인의 작은 로망’이라고 여겼는데, 한 달 동안 TV를 끊어야 한다니.

아내에게 슬쩍 물었다. 아내는 대찬성이었다. 그렇잖아도 TV 시청에 대해 아내와 의견 차이가 있던 터였다. TV를 거의 안 보는 아내는 지금껏 TV 시청에 대해 여러 차례 태클을 걸어왔다. 그러니 이참에 ‘TV돌이’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아, TV 시청에 대한 불만이 이 정도였나. 할 말을 ‘상실’했다. “그래도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어하는데….” “당신이 TV를 보고, 자꾸 틀어주니까 아이가 TV를 보는 것이지! 평소에는 별 관심도 없거든.” 아내가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KO패. 한 달 동안 TV를 끊기로 결심했다.

TV를 끊은 가장 큰 이유는 ‘육아’

그렇다. 한 달 동안 TV 끊고 살기를 해보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가장 큰 동인은 육아였다.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삼촌형 육아’의 달인이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삼촌처럼, 육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때로 집에서 혼자 아이를 돌볼 때면 호시탐탐 TV를 켜주었다.  아이에게 뽀로로와 코코몽과 처깅턴과 카카를 친구로 맺어주고, 나는 홀로 컴퓨터를 두드렸다. 그 엽기적 풍경이 떠올랐다. ‘삼촌’도 각성할 수 있다. 내 생각에도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여기에 유년기에 TV를 많이 보면, 주의력·집중력 결핍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니, 미안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도대체 내가 한 달에 TV를 몇 시간이나 보는 것일까. 워낙 습관처럼 TV를 본 탓에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통계청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나이 등을 입력하니 ‘통계로 보는 자화상’이 뜬다. 2007년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30대 가운데 96.1%가 TV를 시청한다. 평일에 2.6시간, 토요일에 3.5시간, 일요일에는 3.9시간을 본다. 일찍 귀가하면 8시 뉴스 틀어놓고 밥을 먹고, 또 소화시킨다는 핑계로 9시 뉴스를 보고, 내처 드라마까지 보았던 것을 떠올리면, 대략 이 통계치가 내 모습과 근사하다. 그리고 주말이면 각종 스포츠 중계를 오가지 않았던가. 주말에 적어도 3~4시간 동안 TV를 보는 30대 남성. 딱 내 모습이다. 이 정도면 한 달에 평균 20.6시간을 보는 셈이다.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TV 안보기 시민 모임(cafe.daum.net/notvweek)’에 가입했다. 커뮤니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TV 안보기 운동을 해온 서영숙 교수(숙명여대·아동복지학)의 추천을 받고, 〈내 아이를 지키려면 TV를 꺼라〉를 어렵게 구해 읽었다. 절판된 책을 아내가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다 주었다. 책과 사이트에 소개된 TV 중독 체크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예를 들어 ‘TV 때문에 가족과 싸운 적이 있나’ ‘밥을 먹을 때 TV를 보나’ 같은 문항이다. 체크해보니 결과는 ‘TV 의존증’ 판정.

TV 끊기의 최대 걸림돌은 주말

이번 주 월요일부터 TV를 끊었다. 첫 주는 가뿐했다. 왜? 회사 일과 저녁 약속 때문에 일찍 귀가한 날이 단 하루였기 때문이다. 일찍 귀가한 날, 라디오를 켜놓고 갑자기 남는 시간에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몰라 거실을 서성였던 것 정도가 위기라면 위기였고, 변화라면 변화였다. 기사 마감을 하는 오늘(7월3일 금요일)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TV 프로그램 안내면을 보면서 잠시 아쉬웠다. 〈오래된 미래〉에 나오는 인도의 라다크를 취재한 다큐멘터리와 영화 〈뮌헨〉이 방송된다고 해서. 하지만 괜찮다. 오늘 저녁도 약속이 있다. 일단 TV를 피할 수 있다.

첫 주는 TV와 직면하는 시간을 회피하며 보냈다고 치자. TV를 끊는 것인지 귀가를 피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으로 한 주 동안 ‘TV 끊기’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했다. 문제의식도 생겼다. 자료에 따르면, TV를 끊는 데 주말이 한 고비라고 한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TV 이별식’을 치를 계획이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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