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위 왼쪽)와 무소속 이회창 후보(위 오른쪽)의 ‘보수 대결’이 대선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회창씨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5년을 칩거한 골방 노인네가 아니었다. 11월7일 오후의 기자회견장.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기자회견장까지 이어진 좁은 통로는 지지자들과 기자들이 뒤섞여 난장판 같았다. 경호원들이 팔로 사슬을 만들어 겨우 길을 텄다. 이회창씨가 그 사이를 통과했다. 그의 눈은 정중앙을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 “총재님 힘내세요”를 외쳤지만, 그의 눈매와 입가의 근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회견 도중에 점차 살아났다. 여러 차례 그의 한쪽 입술이 삐죽이 올라갔다. 그 특유의 웃음은 자신감을 드러낼 때나 긴장할 때의 모습이 거의 비슷해서 속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회견 뒤 건물을 빠져나가면서 처음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회창’을 연호하는 지지자들을 쳐다보며 그가 오른팔을 번쩍 쳐들었다. 10년 전, 또한 5년 전 익히 보던 모습이다. ‘창의 귀환’이 드디어 실감나기 시작했다.

이회창씨가 한나라당 전 총재에서 대통령 후보로 신분을 바꾸면서 대선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판세가 변하고 있다. 싱겁게 전개되던 이명박 독주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여야 대결이 관심을 끌지 못하는 반면, 대통령 선거 사상 유례가 없던 ‘야야’ 대결, 보수 대 보수의 대결, 이명박 대 이회창의 대결이 시작되고 있다.

이회창씨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다음날인 11월8일, 〈시사IN〉은 미디어리서치와 함께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39.9%)가 예상대로 선두를 지켰다. 무소속 이회창 후보(23.0%)가 2위,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13.4%)는 3위를 차지했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5.6%),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2.5%), 민주당 이인제 후보(1.5%)가 그 뒤를 이었다.

이명박, 모든 연령대에서 1위 싹쓸이

이명박 후보는 모든 연령대에서 1위를 싹쓸이했다. 호남을 제외하면 전국 어디서나 그가 선두였다. 지난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찍었던 이들 중 절반(50.4%)이 이명박 후보를 선택했고, 노무현 후보를 찍었던 세 사람 중 한 명(31.1%)도 이번에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국민 열 명 가운데 여섯 명(60.9%)은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응답했다.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리라고 본 응답자는 14.8%, 정동영 후보를 꼽은 응답자는 6.8%였다.

통계 수치만 보면 이명박 후보는 부동의 1위다. 하지만 수개월 동안 끄떡없이 유지되던 이명박 지지율이 빠지기 시작했고, 40% 저지선까지 무너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불과 10여 일 전까지 이 후보는 50~55%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회창 출마설로 흔들리기 시작한 지지율이 어느새 10~15%포인트나 추락했다.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올봄 후보 경선 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맹공을 당하면서도 35%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 현재의 지지율이 이 후보에게는 그야말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방어해야 할 마지노선이라고 할 만하다.

ⓒ시사IN 윤무영이회창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던 11월7일 오후, 이 후보 사무실이 있는 서울 남대문 단암빌딩 앞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이 환영 집회를 갖고 있다.
이명박의 위기 반대편엔 이회창의 미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20%대에서 안정되는 모양새다. ‘거품이다’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출마 선언하면 꺼질 것이다’ 등의 우려에서 일단 비켜났다. 2002년 대선 때 그에게 투표했던 이들 중 35.6%가 여전히 그를 지지했다. 한나라당 지지자 26.0%도 당의 공식 후보를 버리고 그에게 기울었다(한나라당 지지자 중 이명박 지지는 61.3%). 충청권 민심은 오차 범위 안까지 접근했다(이회창 28.7% 대 이명박 34.2%).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텃밭인 대구·경북에서도 이회창 후보는 지지율 30%대에 진입했다. 이런 통계 수치는 과거 두 차례나 대선에 출마해서 평균 1000만 표씩 얻었던 그의 저력이 여전히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정동영, 모든 연령대에서 '부동의 3위'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13.4% 지지율로 3위를 차지했다. 정 후보는 국회의원 140명을 거느린 원내 제1당의 공식 후보이자 여권의 대표 주자이다. 경선 승리 직후 그의 지지율은 한때 20%대를 넘나들면서 여야 빅게임이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을 낳았다. 그러나 최근 그의 지지율은 다시 경선 승리 이전 수준으로 밀려났다. 정 후보의 지지율은 모든 연령대에서 이명박·이회창에 이어 3위였다. 지역별 지지율도 호남(45.7%)과 서울(14.8%)을 빼면 여권의 대표 주자라고 보기 민망할 정도의 수치를 나타냈다. 지난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찍었던 이들 중 겨우 23.1%만이 그를 지지했다. 여권의 공식 후보이자, 단일 후보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으면서도 고정 지지층의 상당수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모양새다. 여론조사 통계표는 그의 말마따나 그에게 “비참하고 모욕당한 느낌”을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올해 대선 판도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될 사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국민 과반수는 ‘이회창 출마’(50.6%)라고 응답했다. 20대 대학생들과 대구·경북 지역 유권자들이 이회창 변수가 미칠 영향에 대해 특히 관심이 높았다.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에게 투표했던 이들의 57.2%와 한나라당 지지층 57.3%도 이회창 변수에 주목했다.

얼마 전까지 최대 변수로 예측되던 ‘이명박 후보의 BBK 연루 가능성’에 대해서는 국민 네 사람 중 한 명(24.0%)이 여전히 최대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다. 30대와 자영업자들,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이런 응답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전통 보수층과 젊은 유권자들이 이회창 출마에 따른 대선 구도의 변화에 주목한다면, 중간 계층에서는 이명박 후보의 비리 연루 가능성과 그에 따른 대선 판세의 변화에도 관심이 크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두 가지 이슈 모두 현상 유지를 원하는 이명박 후보 측에서 볼 때는 악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변수에 따른 표심의 향배가 여권 후보 쪽으로 움직일 만한 가능성은 현재까지는 적어 보인다. 통계표를 살펴보면 여론의 흐름은 여야가 아니라 ‘야야’ 사이를 오가고 있다. 여권에서 기대하는 ‘여권 후보 단일화’(3.7%)나 ‘한반도 종전선언 등 남북 관계 변화’(7.6%)가 대선 판도에 영향을 미치리라고 응답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명박·이회창 후보로 대표되는 야권 후보들의 선두 경쟁과 여권 후보들의 지지부진은 역대 선거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명박과 이회창 후보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야야’ 대결의 승부는 어디에서 갈릴까. 두 사람 모두 끝까지 갈까. 중간에 한 사람이 주저앉거나, 보수 후보 단일화에 나설까. 올해 대선 게임의 스포트라이트가 두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다.

ⓒ시사IN 윤무영11월 7일, 이회창 후보 사무실 건너편에서는 이명박 후보 지지자들이 이회창 출마 규탄 집회를 열었다.
〈시사IN〉 조사에서 두 사람의 지지율을 합친 수치는 62.9%. 최근 여러 매체에서 실시한 여섯 차례의 조사 결과도 비슷해서, 두 사람 지지율의 합은 61.2~64.2% 사이에 걸쳐 있다. 올해 상반기 한나라당 후보 경선 때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나눠가졌던 지지율의 합과 비슷하다.

선거 전문가들은 이명박·이회창 후보의 지지율 합계가 65%선을 안정적으로 넘어서면 두 사람이 끝까지 싸우더라도 1, 2등을 나눠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여권 후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30%선을 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역대 선거에서 5% 정도는 여야 후보에게 가지 않고 흩어졌다. 선거 전문가들은 이들을 ‘영원한 부동층’으로 부른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이회창 후보는 단일화나 사퇴 압력에서 벗어나 끝까지 뛸 가능성이 커진다. BBK 사건의 수사 결과에 따른 수혜자가 될 가능성도 생긴다.

반면 이명박·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현재 수준에서 머물 때, 특히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0% 안팎에서 맴돌고 이명박 후보 지지율이 40% 안팎을 유지한다면 보수층 사이에서 이회창 후보에 대한 압박 여론이 거세질 것이다. 이회창 후보가 이런 여론의 압박을 이겨내고 11월26일 후보 등록을 할 수 있을지도 11월 대선 정국의 관전 포인트이다.

BBK 사건 수사가 결정적 변수 될 수도

이명박 후보가 BBK 주가 조작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확인되더라도 이명박 지지자의 62.3%는 ‘계속 지지하겠다’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27.4%가 지지 후보를 바꾸겠다고 답했고, 바꾸는 대상이 주로 이회창 후보(54.0%)에게 쏠려 있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현재 여론조사 지지율로 보면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16.9% 포인트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명박 지지율에서 27.4%가 빠져나가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이회창 후보 쪽으로 이동할 경우 두 사람의 지지율은 산술적으로 볼 때 거의 비슷해진다.

김경준 귀국과 BBK 사건의 수사 결과에 따라 대선 판도에 극적인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여기에 ‘박근혜 변수’까지 더해진다면 올해 대선 정국은 얼마 전까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쓰나미에 휩쓸릴 수 있다. 늦가을 대선 정국이 양이(兩李) 사이의 ‘야야 대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기자명 안철흥 기자 다른기사 보기 ah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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