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중앙대 문과대학 겸임교수·문화 평론가)한때 ‘삼성 로봇’이었던 김용철 변호사. 그는 오랫동안 고액 연봉에 볼모로 잡혔던 자기의 ‘주체성’을 찾고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왜 이 사회는 배울 만큼 배운 이가 직장에 들어가면 로봇이나 기계가 돼야 하나.
인상적인 것은 TV 화면에 비친 한 사내의 모습. 연애와 결혼 외에 다른 생각이 없는 듯이 보이는 드라마 속 여자의 상대역으로 나올 만한 남자. 강남의 결혼 중매업소에서 최상품으로 분류할 엘리트 사원. 그런 사내가 카메라 앞에서 삼성을 대표해 목소리를 낸다.
김용철 변호사가 그동안 삼성이 거액을 들여 정계·관계·법조계를 주물러온 사실을 폭로했다. 굳이 그의 폭로가 아니어도, 삼성이 그동안 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막강한 로비를 해왔다는 것은 상식이다. 심지어 삼성을 옹호하는 이들조차 그의 폭로가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TV 속의 사내는 김 변호사의 폭로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삼성의 공식적 거짓말(?)을 사내는 수없이 다듬었을 것 같은 매끈한 문장으로, 여러 번 연습한 듯 매끄럽게 분절시켜 나갔다. 사명감에서 나온 듯한 그의 단호한 표정에는 비장함마저 흐르고 있었다. 기묘한 인상. ‘언캐니’(uncanny)라는 낱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그 사내는 주체가 아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의 생각이 아니다. 그저 회사에서 그의 머리에 미리 입력해놓은 문장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휴머노이드가 미리 입력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제 말을 기계적으로 생성해 내뱉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삼성 로봇’이 사람과 너무 똑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제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 제가 속한 집단의 공식적 입장만을 얘기해야 하는 직업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특정 사안을 놓고 생길 수 있는 견해 차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내도 자기가 대변하는 삼성의 공식 견해가 거짓말임을 알고 있지 않을까? 바로 여기서 이 사건의 철학적 성격이 드러난다.
배울 만큼 배워 능력을 인정받아 회사에 들어갔더니 기껏 시키는 일이 공중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라. 그 거짓말은 물론 경제활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경제에 기여하기보다는 외려 발목을 잡는 쪽에 가깝다. 여기서 웬만한 사람은 심리적 갈등에 빠질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도 한때는 그 젊은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실존적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거부함으로써 그는 오랫동안 고액 연봉 때문에 버리고 살았던 자기의 ‘주체성’을 되찾고, ‘기계’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사제관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그의 처지는 명령을 거부한 도망 로봇을 찾는 SF 영화를 연상케 한다.


ⓒ난나 그림
연봉 아무리 많이 받아도 노조가 필요한 이유


“연봉 많이 주는데 노조가 왜 필요하냐?”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노조가 그저 임금 올리는 수단일 뿐인가? 노조는 무엇보다 사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1인칭-2인칭 대화 관계를 의미한다. 노조 없는 고액 연봉은 결국 사용주와 노동자가 1인칭-3인칭의 주종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노조가 없어도 된다’는 것은 타인을 돈으로 부릴 수 있는 존재로만 간주할 뿐, 그들을 주체성을 가진 대화 상대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얘기. 연봉이라는 배터리로 남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 아, 우리는 무기적 로봇이 아닌 유기적 생명체라고? 개나 고양이 중에도 웬만한 인간보다 더 호사를 누리는 놈들이 있다.
주체성 없는 삶이 어디 생(人生)인가? 축생(畜生)이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곧 로봇이나 가축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우리 한국 사람들만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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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진중권 (중앙대 문과대학 겸임교수·문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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