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교수는 유인촌 장관을 강하게 비판했다.
“진씨는 2008학년도 카이스트 봄 학기에 미디어미학을 강의했으나, 이른바 마셜 맥루한 같은 미디어학자나 발터 벤야민 같은 철학자를 소개하면서 이를 미디어미학으로 명명을 붙인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사냥에 앞장섰던 어느 매체가 이런 기사를 실었다. 진중권의 강의가 엉터리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다. 도대체 맥루한과 벤야민이 미디어미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따지고 드는 대목에서는 그만 실소를 머금게 된다. 참고로, 마셜 맥루한은 전공이 영문학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어렵다. 또 발터 벤야민이 오늘날 미디어미학의 토대를 놓았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이 기사의 제목이 재미있다. ‘진중권, 독일문화 수업에서 백남준 강의?’ 한마디로, 백남준과 독일 문화가 무슨 관계가 있냐는 거다. 참고로, 백남준은 일본에서 쇤베르크를 공부한 후 독일에 건너가 슈톡하우젠 같은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다가, 그곳에서 요셉 보이스 등과 더불어 ‘플럭서스’ 운동을 일으킨다. 독일에서 일어난 이 예술운동은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가 현대 예술의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이 무식한 자들이 저 처참한 교양 수준을 가지고 감히 남의 수업계획에까지 간섭한다. 주제를 넘어도 과도하게 넘었다. 심지어 이 문제를 가지고 중앙대에 항의도 하겠단다. “중앙대학교 총장실에 독일문화 수업에서 백남준을 가르치고 있는 게 중앙대의 수업 전통이냐며 공식 문의도 해볼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조문 정국에 망언을 했다가 〈와이텐뉴스〉로부터 ‘듣보잡’이라 불렸던 변 아무개씨의 말이다.

한예종을 공격하는 것도 그 수준이나 방식이 똑같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문화판 뉴라이트는 ‘도대체 예술에 왜 이론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무식도 이 지경에 이르면, 아예 견적이 안 나온다. 예술이 이론과 결합된 것이 무려 500년 전 르네상스 시절의 일. 이들은 21세기 대한민국 예술가들을 중세로 데려간다. 예술사 500년을 생략하는 이 가공할 시대착오를 보라.

특히 현대 예술에서 이론이 결정적 구실을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가령 20세기 예술사에 획을 그은 마르셀 뒤샹의 ‘샘’을 생각해보자. 시장에서 사온 변기에 사인만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실기가 필요할까? 뒤샹이 창조한 것은 물리적 객체로서 작품이 아니라, 예술의 새로운 정의였다. 머릿속의 관념이 곧 예술이라 믿었던 개념 예술가들은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대신 잡지에 기고했다.

U-AT 사업 중단시킨 문화부의 ‘무식’

잭슨 폴록처럼 캔버스에 물감을 흘리는 데 얼마나 많은 실기가 필요하고, 버넷 뉴먼처럼 한 색으로 캔버스 전체를 롤러로 밀어버리는 데에는 또 얼마나 많은 기량이 필요할까? 미니멀 아티스트처럼 작품을 제작해달라고 철공소에 전화를 돌리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실기가 필요하고, 앤디 워홀처럼 부하 직원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시키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기량이 필요할까?

더구나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뉴미디어 아트’ 혹은 ‘디지털 예술실천’이라는 것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가령 인공생명을 위한 인터랙티브 설치를 만들려면, 최소한 센서를 만지거나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작품의 콘셉트를 세우려면, 프랙털 이론, 카오스 이론, 복잡계 이론 등 최신 과학 성과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유인촌 장관을 ‘예술의 유령’으로 표현한 한수자 작가의 일러스트 작품.
그럼에도 이들이 이론을 공격하는 데에는 심오한(?) 이유가 있다. 자기들이 ‘좌파’라 지목한 몇몇 교수가 공교롭게도 이론과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론과를 없애 좌파를 축출하겠다는 것이다(한예종에는 6개 원(院)마다 이론과가 있고, 거기에 소속된 교수들은 대부분 좌파가 아니다). 황당하게도 문화부의 감사 처분은 문화판 뉴라이트의 이 ‘초절정 울트라 무식’을 그대로 반영했다.

 U-AT 사업을 중단시킨 것은 문화부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디지털 컨버전스’의 시대에 매체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는 컴퓨터로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편지를 보내며, 책을 쓰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지 않는가? 이런 추세를 반영해 전통적 장르 간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다. 과학과 기술과 예술을 가르던 높은 벽도 무너져내리고 있다.

예술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 영감을 주고, 기술이 예술에 새로운 표현수단을 주는 시대에 문화부는 통섭 사업을 중단하라고 명령한다. 기술과 예술, 기술과 과학을 통합한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를 길러내야 할 시대에 학생들에게 실기만 가르치란다. 왜 그럴까? 거기에 무슨 예술철학적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들이 좌파로 지목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업이라서 중단시킨 것이다. 

과연 ‘MB의 자식’들이다. 생각해보라. 1970년대에 우리나라는 기능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 기술을 갖고 있었던가? 이렇게 기술과 기능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하물며 예술과 기능은 어떻겠는가? MB가 디지털 시대의 정보화 세대에게 땡볕에 나가 ‘삽질’이나 하라고 말하는 것과,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예술가에게 기능에나 전념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동일한 현상이다.

국제적으로 이름이 난 우리나라 예술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연주자와 같은 퍼포머들이다. 거기서 한국은 이미 국제적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창작이다. 정작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다. 연주에도 이론이 필요하거늘, 창작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문화부에서는 한예종 학생들에게 기능만 가르치란다. 한예종 학생들 키워 양촌리 김 회장 회갑 잔치 하려나보다.

기자명 진중권 (중앙대 겸임 교수·독어독문학과)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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