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1일, 마침내 세계보건기구(WHO)가 H1N1 신종 인플루엔자(신종 플루) ‘대유행’을 선포했다. 두려움이 뒤섞인 대유행 선언은 홍콩독감이 유행하던 1968년 이후 31년 만이고, 멕시코에서 신종 플루 감염자가 처음 발생한 지 58일 만이다. 그럴 만도 했다. 신종 플루의 감염 속도가 워낙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6월20일 현재 신종 플루 감염자는 75개 나라 3만5900여 명, 사망자는 170여 명에 이른다.

미국에서 신종 플루가 대유행하면 31만~73만명의 입원 환자(위)가 발생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피해는 경미하다. 감염 환자 84명(추정 환자 5명 포함). 그 덕에 WHO의 대유행 선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국가 재난 단계’ 4단계(관심→주의→경계→심각) 중 2단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의는 ‘해외 신종 전염병이 국내에 유입되거나, 국내에서 신종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를 의미한다(반면, 관심은 ‘해외에 신종 전염병이 발생했거나 국내에 원인 불명의 감염 환자가 발생했을 때’를, 경계는 ‘해외·국내 신종 전염병이 사람 간에 전염되어 다른 지역으로 번질 때’를 뜻한다. 심각은 가장 급박한 단계로 ‘해외·국내 신종 전염병이 교육기관에서 확산 징후를 띨 때’를 말한다).

전병률 질병관리본부 전염병대응센터장은 “다행히 아직 국내에서는 사람과 사람 간에 감염되었다는 보고가 없다. 그래서 주의 단계를 유지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신종 플루의 병원균 H1N1을 위험스럽게 여기는 전문가들은 여전히 걱정스럽다. “요즘 추세로 봐서는 가을쯤 국내에서도 대유행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김우주 교수(고려대 구로병원·감염내과)는 말했다. 그렇다면 질병관리본부는 혹시 있을지 모를 신종 플루 대유행에 대비한 계획을 세워놓았을까. 전 센터장은 “신종 플루가 대유행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내용을 공개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어서 곤란하다”라며 뿌리쳤다.

어떤 내용이 실려 있기에 공포감이 조성된다는 것일까? 다행히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2006년 12월, 서울대 이철희 교수(경제학부)가 만든 질병관리본부 연구 용역 보고서 〈신종 인플루엔자 대유행의 사회·경제적 영향 추계 및 대응 방안〉. 보고서에는 당시 유행하던 H5N1 신종 인플루엔자가 대유행하면 환자 수와 사망자 수가 얼마쯤 발생하고,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될지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디까지나 가상 시나리오라는 점을 명심하고(공포에 떨지 말고), 찬찬히 들여다보자(이하 모든 수치는 발병률 30%, 1차 대유행 기간 8주를 기준으로 계산한 결과이다).       

일단, 사망자가 5만4594명 발생한다. 연령별로는 0~18세가 2291명, 19~64세가 3만4156명, 65세 이상이 1만8147명이다(감염률이 20%이면 전체 사망자가 3만6396명으로 감소한다). 입원 환자 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아서 23만5592명이나 된다. 미국에서도 1999년 비슷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그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8만9000~20만7000명이 사망하고 31만~73만명이 입원한다. 전 세계 사망자는 최소 140만명.

대유행 시 백신 접종 우선순위는?

경제적 손실도 크다. 우리나라에서만 백신 접종비, 입원 환자 치료비 등을 포함해 모두 27조6000여 억원의 손실이 생긴다. 가장 큰 손실은 사망으로 인한 소득 손실. 무려 17조2000억원이 넘는다. 국제 경제에도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힌다. 세계 전체 GDP가 0.6% 하락하고, 세계 무역이 14%나 감소하는 것이다. GDP 손실액은 최저 3300억 달러에서 최고 4조4000만 달러로 추정된다.

녹십자는 최근 신종 플루 백신을 만드는 데 필요한 H1N1 ‘종균’을 확보해(위) 배양 중이다.
문제는 사망자와 입원 환자는 급격히 늘어나는데, 그들을 받아낼 병원이나 영안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병원으로서는 누구는 받고, 누구는 안 받을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쫓겨나는 환자 처지에서는 윤리적·법적 책임을 따지려 들 것이다. 때문에 보고서는 인플루엔자가 대유행하기 전에 백신 접종, 항바이러스제 투약, 치료 및 입원, 병상 및 인공호흡기 사용 등의 우선순위 등을 미리 정해둘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신종 인플루엔자로 인한 입원 환자의 38%는 대유행 8주 기간 중 4~5주째 발생한다. 그 때문에 이 시기에는 하루 평균 6600여 명이 병원으로 몰려든다. 중환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1주일에 9000명 정도가 중환자실로 밀려든다. 보고서를 만들 당시 전국의 중환자실 병상 수가 1만2800개이고, 인공호흡기가 5900여 개에 불과했으니 그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때 가장 시급한 것은 항바이러스제와 신종 인플루엔자 백신 접종. 2006년 현재 전 세계에서 연간 생산할 수 있는 백신의 양은 3억명분, 전체 인구의 5%만 혜택을 입는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만 항바이러스제 1000만명분과 인플루엔자 백신 1500만명분이 우선 필요하다. 질병관리본부 인플루엔자 자문위원회가 권고한 우선순위에 따른 필요량이다.

자문위원회가 권고한 항바이러스제 투약 우선순위는 ①입원 환자 ②병·의원 종사자 ③고위험군과 외래 환자 ④역학조사·격리·검역 담당자 ⑤119 구급대·소방관·경찰 순이다. 백신 접종 우선순위는 약간 달라서 1순위가 병·의원 종사자이고, 2순위는 필수 서비스 유지 인력(경찰·소방관·통신 및 언론 종사자 그리고 교통 및 수송 인력 등)이다. 군인·장의사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행히 인플루엔자 항바이러스제와 백신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으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두 약품이 부족하다면? 보건당국도 그 점을 걱정한다. 그러나 아직 신종 플루 백신을 확보해둘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전 센터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사람 간에 전염이 없어서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 게다가 국내 백신업체와 외국계 백신업체 간에 물량 경쟁이 일어날 수 있고, 판매가가 높이 책정될 수도 있어 구매 결정을 좀 더 신중히 내릴 계획이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국회로부터 신종 플루 백신 130만명분 확보 자금 182억원을 지원받은 상태다. 문제는 시기. 섣불리 백신 매입 결정을 내렸다가 신종 플루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면 귀한 백신이 하루아침에 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백신을 하루바삐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우주 교수는 “지금도 늦은 감이 있다”라고 말했다. 갑갑한 것은 국내 유일의 백신 생산업체 녹십자도 마찬가지다. 녹십자 관계자는 “몇몇 나라의 경우 백신 개발이 상당히 진행되었다. 우리나라도 서두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녹십자는 정부에 130만명분을 구매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정부는 특혜 시비 우려가 있다며 거절했다). 6월18일, 식약청 강석연 생물제제과장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더라도 “국산 신종 플루 백신이 연내에 허가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과연, H1N1 바이러스는 이 ‘갈등’을 못 본 체 지나갈까.

기자명 오윤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nom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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