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벌판에 참혹한 시체가 누워 있다. 멍들고 찢긴 알몸 시체. 눈을 부릅뜬 채 썩어 문드러진 여자를 처음 발견한 목격자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다. 대신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찬찬히 시체를 살펴본다. 목격자는 차라리 죽어버린 여자가 부러울 만큼 도무지 희망 없는 인생을 사는 여자다. 이윽고 시체 목에 걸린 피 묻은 액세서리를 떼어 들고 다시 벌판을 가로지르는 여자의 머리 위 창백한 하늘 한복판, 굵은 고딕체 활자가 뜬다. ‘The Dead Girl’. 황량하기 짝이 없는 오프닝에 잘 어울리는 참 황량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데드걸〉에는 말 그대로 ‘죽은 여자’ 한 명과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여자 네 명이 등장한다. ‘죽은 여자’를 처음 발견한 목격자, ‘죽은 여자’가 필시 오래 전 잃어버린 언니가 맞을 거라 확신하는 검시관, 멀쩡한 딸이 ‘죽은 여자’로 돌아온 충격에 할 말 잃은 어머니, 그녀의 멀쩡한 딸을 ‘죽은 여자’로 만들어버린 연쇄살인범의 아내, 그리고 죽은 여자 바로 본인. 90분이 살짝 넘는 상영 시간 동안 마침내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의 조각 퍼즐로 끼워 맞춘 영화는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징그러운 진실 한 덩이를 꺼내어 툭, 관객 혓바닥 위에 던져놓는다. 산다는 건 결국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는 여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생이란 끝내 맞추지 못한 조각 퍼즐처럼 쓸모없는 존재들이 치러야 할 지루한 의무방어전에 불과하다는 씁쓸한 진실 말이다.

젊은 여성 감독 카렌 몬크리프는 2002년 우연히 살인 사건 배심원을 맡으면서 이 우울한 조각 퍼즐을 구상했다. 희생자가 매춘부였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그렇고 그런 여자가 그렇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 그렇고 그런 죽음을 당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밀려드는 순간, 아뿔싸, 명색이 영화감독이라는 작자가 덜컥 품어버린 지독한 편견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감독과 여배우들이 만든 ‘묵직한 여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희생자가 사랑한 유품과 희생자를 사랑한 유족을 통해 죽은 여자의 삶이 재구성되었다.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결국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한 한 여자의 죽음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완성한 영화는 오랫동안 관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쉬이 덜어내기 힘든 묵직한 여운의 절반은 분명 감독의 힘. 브리트니 머피·마샤 게이 하덴·로즈 번 등 침착한 여배우의 사려 깊은 연기가 나머지 절반의 저력에 힘을 보탠다.

많은 영화들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믿고 싶은 관객들과 처음부터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그 누구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 주는 안락한 재미를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그깟 알량한 재미, 썩 포기하지 못할까!’ 안면 싹 바꿔 괜히 호통칠 생각 따위는 없다. 다만 가끔은 세상의 불행을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영화를 보면서, 남의 불행에 영 무심했던 자신을 잠시 타박하는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떠냐고 주제넘은 당부의 말씀 올린다. 〈데드걸〉은 모처럼 그런 시간 보내기에 딱 좋은 영화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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