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야구 전문가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 야구를 이해하려는 선수로 두산의 리오스(위)를 꼽는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SK 김성근 감독은 에이스 케니 레이번의 등판 일정을 1차전과 5차전으로 잡았다. SK에는 뚜렷한 4선발감이 없었음에도 에이스 레이번을 4차전에 투입하지 않았다. 단기전에서 이는 아주 큰 모험이었다. 모험을 건 까닭은 정규 시즌 22승을 거둔 두산 에이스 다니엘 리오스가 1차전과 4차전에 등판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에이스끼리 대결해도 리오스가 이길 확률이 높다고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시리즈 4차전은 김광현이라는 영웅을 탄생시키며 리오스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김 감독의 경기 전 계산은 분명 ‘승률 49% 이하’였다. 김 감독이 4차전 승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는 진짜 ‘야구의 신’일 것이다. SK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원래 구상은 2, 3, 5, 6차전에서 이긴다”였다. 리오스가 등판하는 1, 4차전은 어렵다고 봤던 것이다.

그만큼 리오스는 압도적인 투수였다. ERA+라는 야구 통계가 있다. 리그 평균 방어율을 개인 투수 방어율로 나눈 뒤 100을 곱한 값이다. 평균에 비해 얼마나 효율적으로 투구했는지를 알 수 있는 값이다. 리오스의 올해 ERA+는 189로 역대 시즌 20경기 이상 선발 등판한 투수 가운데 일곱 번째로 뛰어났다. 리오스는 지난 10월31일 78% 득표율로 올해의 프로야구 MVP로 뽑혔다. 외국인 선수들은 과거 MVP나 골든글러브 투표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 1998년 MVP 타이론 우즈는 LG 김용수와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우즈의 이름이 ‘이승엽’이나 ‘심정수’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2004년 현대의 클리프 브룸바도 타자 가운데 단연 최고였지만 투표에서 13표를 받는 데 그쳤다. 리오스의 MVP 선정은 외국인 선수가 이제는 프로야구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여짐을 뜻한다.

외국인의 경기로 시작된 야구

야구에서 외국인 선수의 역사는 야구의 도입기인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공식적으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한국 야구의 아버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초창기 한국 야구를 키운 외국인은 일본인이었다. 일제시대 교육 과정에 야구가 포함됐던 게 야구 발전의 큰 계기였다. 특히 성인 야구는 일본인의 독무대였다. 원로 스포츠 기자 조동표는 “일제시대에는 도쿄 6대학 출신 선수들이 조선에서 많이 뛰었다. 식민지 근무 수당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31년 경성신문사가 주최한 제8회 조선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던 조선인 선수는 모두 6명뿐이었다.

〈한국 야구의 원류〉를 쓴 일본인 작가 오시마 히로시는 “광복 이후 창설된 대표적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와 황금사자기는 일본의 고시엔 대회와 센바쓰의 운영 방식을 따왔다”라고 주장했다. 광복 직후에는 일본 프로야구 출신 선수가 새로이 정립된 ‘한국 야구’에 몸담았다. 일제시대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뛴 원로 야구인 유완식은 1997년 한 인터뷰에서 “광복 뒤 YMCA에서 야구선수 등록을 받았다. 모인 사람들을 보며 ‘어, 저 사람도 한국 사람이었구나’라고 놀랐다”라고 회상했다.

절반의 한국인, 절반의 이방인 재일동포

야구사에서 재일동포 선수는 오늘날 외국인선수와 비슷한 위치다. 본격적인 재일동포의 등장은 대한야구협회가 1963년 서울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일본 사회인야구 야시카카메라에서 뛰던 신용균을 귀국시키면서부터다. 이후 김영덕, 김성근, 김호중, 배수찬 등 많은 재일동포가 한국 실업야구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국내 야구 발전에 기여했지만 ‘반 일본인’이라는 시선 때문에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 뒤 한동안 잠잠하던 재일동포 귀국 붐은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다시 일었다. 1983년 삼미 슈퍼스타스는 일본 프로야구 승률왕 출신 장명부를 영입한다. 그리고 삼성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두 차례 방어율 타이틀을 땄던 김일융을 데려왔다. 이들은 한 수준 높은 기량으로 초창기 프로야구에 많은 자극을 줬다. 주동식, 김무종, 홍문종, 이영구, 김기태, 최일언, 김성길, 고원부 등도 1980년대를 풍미한 재일동포 출신 스타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들의 활약은 잦아든다. 1982~1989년 입단한 재일동포 선수들은 모두 22명이다. 그러나 1990~1999년에는 9명으로 줄어든다. 활약도 미미했다. 여기에는 국내 선수들의 기량 향상 외에도 환율 변화라는 요인이 있다. 1985년 9월22일 프라자 합의 이후 원엔 환율은 치솟았다. 1986년 11월8일 100엔당 환율은 527원(매도 기준)이었지만 1994년 11월8일에는 806원이었다.
 

ⓒ연합뉴스일본 프로야구 승률왕 출신 장명부(위 오른쪽)와 김일융(위 왼쪽)은 한국에서 맹활약했다.

외국인 선수의 명과 암

지금의 외국인 선수 제도는 1998년에 도입됐다. 처음 2년 동안에는 KBO가 트라이아웃을 통해 선수를 선발했지만 지금은 자유계약 방식이다. 올해까지 한국 프로야구 1군에서 출전 기록을 남긴 외국인 선수는 모두 161명이다.

외국인 선수는 전반적으로 프로야구의 수준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구단들은 투수는 1, 2번 선발이나 마무리, 야수라면 중심 타선을 맡아줄 거포를 기대하며 외국인 선수을 뽑는다. 우수한 선수들이 늘어나면 수준이 높아지는 게 야구의 법칙이다.

부정적 영향도 있다. 일부 야구인은 외국인 선수의 영향으로 프로야구에 약물이 남용되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국내 선수와 갈등이 생길 소지도 있다. 한 투수는 “외국인 선수는 등판이나 사생활 등에서 특혜를 받고 있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제도적으로도 외국인 선수는 국내 선수와 다르게 취급된다. 다년 계약이 불가능하며 선수협회에도 가입할 수 없다. 어기는 구단도 있지만 연봉도 상한제에 묶여 있다.
외국인 선수는 낯선 한국야구에서 문화적 차이를 느낀다. 현대 출신 한 외국인 선수는 “왜 한국 선수들은 공에 맞거나 선수끼리 부딪히면 엄살을 피우는가. ‘푸시 베이스볼(Pussy Baseball, 계집애들의 야구)’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8개 구단의 공통인 고민은 어떻게 우수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한 것인가다. 올해 정규 시즌 상위권 네 팀(SK, 두산, 한화, 삼성)은 모두 외국인 선수가 제 몫을 했다. 반면 하위권의 네 팀은 정반대였다.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엄홍 전 현대 운영팀 과장은 “야구장이든 야구장 밖이든 외국인 선수가 구단 및 동료와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라고 말했다. 야구 전문가들이 대체로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 야구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선수로 리오스를 꼽는 것처럼 말이다.

기자명 최민규 (스포츠 2.0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