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비닐봉지에 생수 한 병, 김밥 한 줄, 오이 하나 달랑 넣고 처음 서울 북한산에 오르던 2004년 가을 무렵과 비슷하다. 직장도 고정적인 밥벌이도 없는, ‘가진 것 없는’ 40대인 것도 똑같다. 하지만 5년 전과는 많은 게 달라졌다. 가진 것 없는 주제에 오히려 많은 걸 덜어냈다. 우선 20kg 가까이 살을 덜어냈다. 그리고 머릿속을 짓누르던 상념의 부스러기를 덜어내 책 한 권을 썼다.

〈백수 산행기〉를 쓴 김서정씨는 “나뭇잎이 바람에 뒤집혀 흔들리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라고 말한다.
〈백수 산행기〉의 저자 김서정씨(44)는 10년 가까이 출판사를 전전하며 밥벌이를 하다가, 2004년 실직하고 백수의 길로 들어섰다. ‘세상의 본질을 깨친답시고 두툼한 책을 끼고 앉아 몽상만 일삼으면서도 은근슬쩍 밥은 많이 먹던’ 운동 부족 저자가 산에 오른 건 남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서였다. ‘뭐에 홀린 듯’ 평일 오전 집을 나서 남들 40분 걸리는 북한산 대남문 코스를 2시간 만에야 오른 이래, 그는 지난 5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북한산에 올랐다. 그 기록을 정리해 모은 책이 〈백수 산행기〉이다.

이 책은 전문 등반 안내서도 아니고, 유명 작가의 에세이집도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북한산 초보를 위한 산행 에세이’ 정도의 내용이다. 출판사의 보도자료 내용처럼 전문가 수준의 산악인이나, 탄탄대로의 회사원은 김씨의 ‘저질 체력’ ‘후들후들 산행’에 속이 터지거나, 평일에 한가하게 산에 다니는 그를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평범한 백수의 넋두리 같은 이 정체불명의 책을 읽고 적잖은 사람이 공감을 표했다. 그는 “요즘 같은 불황에 별 내용도 없는 책이 석 달 만에 재판을 찍었다는 게 신기하죠?”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인터넷 등에서는 ‘내 심정과 똑같다’며 그의 책에 감정이입한 사람 제법 많다. 가령 ‘나는 내가 일해온 분야에서 아무런 성과도 못 이루고 회사에 손해만 잔뜩 끼치고 물러나야 했다. 패배감 때문에 내 분야에서 재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은 짠하다. 산 중턱에 올라 옛날 살던 동네가 보인다며 아내에게 전화를 해 호들갑을 떨다가 ‘평일에 산에 가는 게 자랑이냐’라는 핀잔을 듣고 시무룩해지거나, 함께 일하던 동료가 요즘 뭐 하느냐고 묻자 “지배계급(집에 계급)이 되었습니다”라며 눙쳐야 하는 그를 떠올리면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김서정씨의 이야기에 많은 이가 감정이입한 것은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에 전전긍긍하는 우리 시대 사회인의 심경을 위무하는 까닭일 게다. 속되게 말하면 지긋지긋하게 ‘안 풀리는’ 그의 삶을 엿보면서 ‘나는 아직 괜찮구나’ 하는 상대적 안도감 따위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산행을 통한 자기 치유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 또 하나는 사회의 윤활유 구실을 하는 공무원·예술가 같은 인간. 그동안 나는 이윤을 추구하는 쪽에서 일했는데, 결국 내가 이윤을 못 내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나이 사십에 그걸 깨달으니까 정말 밑바닥까지 가게 되더라고요. 백수라는 건 이 물질세계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건데, 어찌 보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때 산이 아니었더라면 혼자 술 마시면서 끙끙 앓다가 폐인이 됐을 거예요. 그런데 산이 날 살려준 거죠. 한번 산에 다녀오면 ‘내일모레 또 산에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게 되더라고요.”

평화와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는 김서정씨(위)는 서대문형무소 안내 자원봉사를 한다.
물론 지난 5년 동안 그가 산에만 미쳐서 아무 일도 안 한 건 아니다. 틈틈이 교정·교열 일거리를 얻어와 ‘최저생계비’를 벌었고, 청소년 동화를 써서 출판사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또 한 번 극심한 패배감에 시달릴 때쯤 본격적인 산행기를 쓰게 됐다. 그 계기는 이렇다. 한 번은 동네(경기 고양시 화정동) 산악회원과 함께 태백산에 갔다가 일행 중 한 명이 부상해 소방대원의 도움을 받았다. 산악회장은 김씨더러 소방서 홈페이지에 감사의 글을 올려달라 부탁했고, ‘좀 갖춰서’ 글을 썼더니  산악회 아줌마들이 ‘뭐 하는 사람이냐’며 난리가 났다. 그의 글에 반한 것이다. 말하자면 ‘태백소방서 게시판’이 그의 등단 무대가 된 셈이다. “아줌마들이 칭찬해주니까 기분이 좋더라고요. 이제는 산행 뒤 산행기를 안 쓰면 아줌마들로부터 전화가 와요. ‘어이, 김 작가 글 안 쓰고 뭐 해’라면서.(웃음) 한 번은 한라산에 다녀와서 산행기를 쓰는데, 원고지 50장을 쉬지도 않고 쓰고 있더라고요. 단 두 시간 만에.”

지금이야 ‘찌질한 40대’로 살아가는지 몰라도, 그에게도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 그는 1990년 겨우 스물다섯 살 나이에 〈열풍〉이라는 소설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문학 수재였다. 당시 김씨의 작품을 심사한 소설가 윤정모씨 등은 “농민문학의 황폐화를 보이고 있는 이때에, 이 작품은 오히려 능숙한 솜씨로 ‘잃어버린 농촌’에 꿈틀거리는 ‘참농민 세상의 꿈’을 아로새겨 보여주고 있다”라며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이르게 꽃이 핀 것일까. 그 뒤로   소설 몇 편을 더 써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결국 서른 살에 그는 작가의 꿈을 접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인이 된 뒤로는 일절 글을 쓰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가 쓴 〈백수 산행기〉에는 ‘13년의 절치부심’이 녹아 있는 셈이다. “20대 때에는 좋은 문장 한 구절 쓰려고 밤새 고민했어요. 오정희 같은 글쟁이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산을 자주 타다보니 나도 모르게 걸으면서 리듬을 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리듬과 호흡대로 글을 써봤죠. 그랬더니 남들이 단숨에 읽히는 글이라고 하데요. 글에도 리듬이 있다는 걸 산에 다니면서야 뒤늦게 깨달았어요.”

산에 오르면서 김씨는 많은 게 변했다. 담배와 고기를 끊었고, 골방에 숨어 자책하던 버릇도 고쳤다. 몽상과 관념을 버리고 일거리 찾기도 더 적극 하게 됐다. 꾸준한 산행 덕에 ‘북한산 모니터링단’에 뽑히기도 했다. 요즘에는 매주 서대문형무소에서 시민을 안내하는 ‘평화길라잡이’ 활동도 펼친다. 물론 당장 ‘돈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만.   

“도시의 길은 제약이 많잖아요. 건널목도 있고, 건물도 가로막고. 그러나 산의 길은 내 마음대로죠. 처음에는 쉬운 길로만 다녔어요. 그러다 차츰 어려운 길을 다녔죠. 길이 없는 곳으로도 가보고. 마치 새 삶을 사는 것 같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솔직하게 나를 까발리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원래 이 책을 쓸 때 백수에게 희망을 주고, 자기 치유로서의 글쓰기에 대해 권하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글을 쓰다보니 정작 나 자신이 치유되더군요.”

짧은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우리는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별스럽게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기자도 감정이입하고야 말았다.  동행한 사진 기자도 〈시사IN〉 창간 과정의 힘겨움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그렇게 실컷 삶의 불안과 신산스러움을 떠들고 났더니 뭔가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 역사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까닭 모르게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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