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

‘안전핀이 뽑혔다.’
대법원에 계류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 “에버랜드 사건은 증인과 증언이 ‘통째로’ 조작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에버랜드는 놀이공원일 뿐이지만,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는 그저 그런 계열사가 아니다.

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성격을 띤다. 이건희 회장 일가가 절대 놓칠 수 없는 회사다. 놀이공원 운영이 주요 사업인 이 회사가 대한민국 최고의 제조기업(삼성전자)과 한국 최대 보험회사(삼성생명)를 거느리게 된 비결은 한국 재벌 특유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에 있다. 삼성전자의 최대 주주는 삼성생명이고,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는 삼성에버랜드이다. 이 에버랜드의 최대 주주가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인 것이다.

그러니 김용철 변호사의 조작 증언은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심장부에 메스를 들이댄 것과 같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사실이라면, 이들이 천문학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해 검찰 등 법조계와 재경부·국세청·금감위 등 경제부처 관료, 정치권에 뇌물을 주며 관련 법과 제도를 유리하게 고치려 했던 목적도 다름 아닌 지배 체제 유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 변호사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 회사법 논리와 무관한, 지분 비율과도 상관없는 불합리하고도 이상한 권력(지배) 체제를 만들어서 그것을 영속하려는 욕심에서 영향력 있는 관련 국가기관을 마비시킨’ 사건이다. 결국 에버랜드 건은 모든 삼성 문제의 이른바 ‘몸통’인 셈이다.

 11월6일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 김인주 전략기획팀장(사장) 등을 8가지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크게 지배권 불법 승계와 비자금 조성을 통한 불법 로비 두 부분이다.

고발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이후 삼성그룹에 입사한 김용철은 2003년 12월 검찰이 삼성에버랜드 사건을 기소하기 전후로, 사건을 주도한 피고발인(이건희·이학수·김인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재무팀 관재 파트에서 마련한 조작된 시나리오에 따라 법무팀 소속 변호사를 동원하여 사건의 실체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검찰 조사에 대비한 모의연습을 시켰다. 삼성그룹 본관 옆 태평로빌딩 26층과 27층의 보안이 잘 되는 사무실에서 거짓 진술을 하도록 교육했다.’ 김 변호사는 11월7일과 8일 〈시사IN〉과 만나서 이같은 내용을 재확인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에버랜드 사건은 이렇다. 1996년 12월3일 에버랜드의 주인이 돌연 바뀐다.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전무로.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지배권이 바뀌는 엄청난 일을 전문 경영인인 당시 허태학 사장과 박노빈 상무가 ‘주인의 허락 없이’ 저지른다. 1996년 10월30일, 두 사람은 이사회를 열어 전환사채 발행을 결의한다. 그런데 당시 에버랜드의 주주 26명 중 제일제당(현 CJ)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주주들이 현저하게 낮은 가격에 배정된 전환사채(전환사채 발행총액의 약 97%)를 모두 실권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진다. 두 사람은 1996년 12월3일 이사회를 다시 열어 실권된 전환사채 전부를 이 회장의 네 자녀, 이재용·이부진·이서현·이윤형에게 배정한다. 전환 가격은 7700원(검찰은 당시 거래된 가격 가운데 가장 낮은 1주당 8만5000원으로 평가했다).
 

ⓒ시사IN 안희태최근 에버랜드 사건의 증인과 증언이 통째로 조작되었다고 폭로한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은 두 사람이 전환사채 발행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전환사채 발행 이사회, 열리지도 않았다”

이 가운데 재판 과정에서 달라진 것은 이사회가 열렸으나 17명 이사 가운데 8명이 참석해 정족수 미달로 무효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다른 주장을 편다. “아예 이사회가 열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서류를 다 만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전에는 삼성전자 같은 상장회사도 기록은 있지만, 실제로 (이사회가) 열린 적은 거의 없다. 얼마 전 후배 변호사에게 에버랜드 이사회 의사록에 혹시 ‘이사진’이라는 도장 안 찍었느냐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 이사 모두를 이사진 도장 하나로 찍었다는 것이다. 에버랜드 법인주주들은 아예 발행 사실 자체를 몰랐으니 포기한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일을 구조본이 했다. 이사회 개최도 그렇고, 전환사채 대금 납입도 그렇고, 모든 일이 한두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에서 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재판 등에서 드러난 기록으로도 에버랜드 이사회는 청약 만기일인 12월3일이 다 지나가지 않은 오후 4시에 서둘러 이사회를 열어 실권 전환사채를 이재용 등 이 회장 자녀에게 배정했고, 이 회장 자녀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시간 후인 오후 5시에 인수대금 96억6181만원을 은행에 납부했다. 전광석화처럼 해치운 것이다.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바꾸는 행동도 재빨랐다. 이 전무는 청약 다음날인 12월4일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했고 세 딸은 17일 전환했다. 이 결과 이 회장 자녀들이 단박에 확보한 지분은 64.7%(이재용 31.27%). 에버랜드를 송두리째 수중에 넣은 것이다. 이것은 삼성그룹의 경영권이 대물림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은 60여 계열사 가운데 왜 하필 에버랜드를 찍었을까. 1996년 당시 에버랜드는 자산총액이 8387억원이지만, 자본금은 35억3600만원에 불과해 지배 지분을 확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가급적 적은 돈으로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통째로 이 전무에게로 대물림하려는 계획이 성안된 것은 적어도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건희 회장은 1994년 10월부터 1996년 4월까지 해외에 유학 중이던 이재용 전무에게 61억4000만원을 증여한다. 16억6000만원을 증여세로 내고 44억8000만원을 종자돈 삼아 구조본 관재 파트는 상장 전 계열사 전환사채를 헐값에 인수하는 방법 등을 통해 이 전무 재산을 ‘튀기는’ 과정을 반복한다. 재산 증식에 동원된 회사들은 삼성에스원·삼성엔지니어링·제일기획·삼성SDS 등이었다.

전문 경영인이 ‘그룹 주인’을 바꾸었다고?

에버랜드가 현재의 위상을 갖도록 갑작스러운 지분 변동이 일어난 시점은 1998년 말이다. 이 회장과 에버랜드가 삼성그룹의 전·현직 임원들에게 위장 분산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9000원에 사들인 것이다. 이 거래로 이 회장 지분율은 10.00%에서 26.00%로, 에버랜드는 2.25%에서 20.67%로 크게 늘어난다. 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주요 상장·비상장 계열사의 지분을 갖고 있는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가 됨으로써 사실상 지주회사이자 지배구조의 핵심으로 올라선다.

 

 

 

ⓒ뉴시스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박노빈 당시 상무(현 사장·왼쪽)와 허태학 당시 사장(오른쪽)이 항소심 속행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여론이 갈수록 악화하면서 검찰은 공소시효를 하루 앞둔 2003년 12월1일 이 건을 법정에 세우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에버랜드 사장과 상무만을 불구속 기소한, 분리 기소였다. 즉각 ‘기소자 명단에 왜 이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김인주 사장 같은 구조본 핵심 인사가 빠졌느냐’는 비난이 터져나왔다. 그룹 차원의 조직적 공모가 아니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선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과정 자체가 그렇다. 전문 경영인이 그룹 주인을 함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데다, 이 회장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제일제당(이재현 회장) 외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실권했으며, 실권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이 전무는 인수 대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딸의 경우는 실권 청약이 이루어지던 날 당시 에버랜드의 이사이자 13.16% 지분을 가졌던 이 회장이 48억원을 증여해 이 돈으로 인수를 한다(각각 10.46%). 이 회장은 자신에게 배정된 전환사채(13억원 상당) 인수를 포기해 지분이 4.65%로 내려앉는다.

이런 일련의 일이 이 회장의 지시나 승인 또는 그룹 전체 차원의 기획 없이 가능한 일이냐는 의문을 품게 하는 사례는 많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결의를 하기 나흘 전인 1996년 10월26일 중앙일보에서도 에버랜드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30억원 상당의 전환사채를 발행했는데 웬일인지 1대 주주인 이 회장(26.44%)을 비롯해 제일제당을 뺀 모든 중앙일보 주주들이 실권한 것이다. 이 물량은 홍석현 사장에게 돌아갔고 그의 지분은 단박에 0.58%에서 21.51% 로 치솟아 1대 주주로 떠오른다. 결국 홍 사장이 경영한 중앙일보는 에버랜드의 1대 주주(48.24%) 자리를, 이 회장은 중앙일보 1대 주주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매부·처남이 에버랜드와 중앙일보의 지배권을 맞교환한 셈이다.

그룹 차원의 공모 여부에 대해 에버랜드 전환사채 변칙증여 사건을 다룬 1, 2심 재판부는 판단을 유보했다. 증거가 불충분해 판단하지 않았다는데, 김 변호사 주장이 사실이라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김 변호사는 검찰 기소가 임박하면서 구조본 안에서는 “쇠고랑 찰 일인 줄 알았으면 이렇게 허술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이 나왔다고 한다. 법무팀장으로서 조작 작업을 지휘한 그는 기소 자체가 안 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기소를 피할 수 없다면 이 회장과 구조본 인사들이 다치지 않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털어놓았다. 허태학 사장이 거세게 저항했다는 사실도 귀띔했다. “외아들인데 꼭 징역 가야 하느냐, 법정에 서야 하느냐”라며 반발했다는 것이다.

삼성과 관련한 재판이어서 그랬는지 에버랜드 사건은 진기록을 양산했다. 1996년 전환사채 발행이 이루어진 지 10년6개월 만에, 법학교수 43명이 고발한 지 7년 만에, 검찰이 2003년 12월1일 공소시효를 불과 하루 앞두고 두 임원만을 부분 기소한 지 3년6개월 만에 2심 판결이 내려졌다. 기소 이후 주임 검사가 열한 번, 부장 검사가 아홉 번 교체되었다.

진실 규명해도 ‘대물림 경영권’ 유지될 듯

이런 검찰의 ‘폭탄 돌리기’ 양상은 재판부에서도 재연되었다. 1심에서 2005년 2월 선고 예정이었던 당시 재판부는 15차례나 공판을 거쳤음에도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변론을 재개했고, 이후 재판부가 교체되면서 2005년 10월이 되어서야 선고가 이루어졌다. 2심에서도 담당 판사가 세 차례 교체되었고, 올해 1월 예정되었던 선고 기일도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 차례 연기되다가 올 5월에야 선고가 내려졌다.

대검찰청에 특별수사팀을 꾸려달라는 고발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검찰 수뇌부는 서울중앙지검에 배당했다. 검찰이 얼마나 의지를 갖고 수사할지 지켜볼 일이지만, 진실이 규명되더라도 대물림한 경영권이 되돌려질 공산은 크지 않다. 이 회장과 이학수·김인주 등 전략기획실 핵심 인사들을 기소하는 것도 녹록지 않을 것이다. 설령 치밀한 각본에 따라 조작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더라도,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자체가 무효로 판명 나야 기대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 벌어질 수사 상황과 법적 다툼과는 별개로 이 회장에게는 또 다른 난제가 있다. ‘가신 그룹이 대한민국의 소중한 자산인 삼성을 망치고 있다’는 비난이 임계점에 달한 것이다. 이 회장으로서는 후계 구도를 완성하기 위해 ‘금산 분리’라는 법률 위험을 제거할 이학수·김인주라는 지배구조 ‘기획자’가 필요하지만, 이들을 부둥켜 안고 갈수록 이 회장은 한국 사회에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지배구조의 안전핀이 뽑힌 상황에서 이 회장은 가신 그룹을 척결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삼성에버랜드 사건 11년간의 일지

1996. 10. 30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 결의(총액 99억5459억원, 전환가격 7700원)

1996. 12. 3

실권 전환사채 125만4000주를 이재용·이부진·이서현·이윤형에게 배정

2000. 6. 29

법학교수 43명, 이건희 회장 등 삼성에버랜드 이사 및 주주 계열사 임원 33명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 혐의로 고발

2003. 2. 27, 11. 20

법학교수 43명과 참여연대, 검찰 수사 촉구 기자회견

2003. 12. 1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채동욱), 공소시효 만료 하루 앞두고 허태학·박노빈 당시 사장과 상무를 불구속 기소

2005. 1. 10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 결심 공판에서 허태학 징역 5년·박노빈 징역 3년 구형

2005. 2. 2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재판장 이현승), ‘경제에 미칠 영향’ 이유로 선고일 연기

2005. 2. 1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 ‘사실관계 추가 심리 필요’ 이유로 선고일 연기

2005. 3. 1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 인사로 인한 재판부 변경 후 첫 공판

2005. 10. 4

서울중앙지법, 허태학 징역 3년·집행유예 5년, 박노빈 징역 2년·집행유예 3년 선고

2005. 12. 20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첫 공판

2006. 2. 7, 2. 10

대법원 정기 인사로 재판부 교체, 새 재판부 부임

2006. 7. 20

서울고법 형사5부, 검찰에 ‘공모 혐의 더 입증하라’며 석명 요구

2006. 8. 10

서울중앙지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비공개 소환 조사

2006. 8. 28

대법원 법관 인사로 재판장 교체

2006. 9. 28

서울중앙지검, 이학수 부회장 비공개 소환 조사(11월 말까지 총 세 차례 소환)

2007. 1. 18

서울고법 형사5부 재판부(재판장 조희대 부장판사), 선고일 연기 및 변론 재개

2007. 5. 29

서울고법 재판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 유죄 인정. 허태학·박노빈 징역 3년·집행유예 5년, 벌금 30억원 선고

2007. 5. 30

삼성 측, 대법원에 상고

2007. 6. 5

검찰, 상고. 현재 3심 진행 중

 

 

기자명 장영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c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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