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 :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처음으로 주관한 주말 집회. 확성기와 무대와 사회자가 등장했다.
5월24일 : 시위대가 길거리로 진출했다. 멋모르고 샌들을 신고 나온 한 일간지 기자는 겨우 문을 연 가게를 찾아 털이 북슬북슬한 실내용 슬리퍼를 사 신고 길바닥을 뛰었다. 첫 연행자가 나왔다. 밤을 꼬박 새며 인터넷으로 집회 중계를 보는 ‘재택집회’ 문화가 등장했다.
5월27일 : 무리한 연행과 훈방을 반복하는 경찰에 대한 인터넷 특유의 풍자 ‘닭장차 투어’가 현실에서 등장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시위대 113명은 제 발로 ‘닭장차’에 올랐다. 이 정부의 ‘뒤끝’이 어느 정도인지 그때는 다들 몰랐다.
5월29일 : 쇠고기 수입 고시가 발표됐다. 집회역사에 남을 ‘유모차 행진’이 이날 처음 등장했다. 평일 집회에 1만명이 넘는 참가자가 모였다(대책회의 추산 4만명).
5월31일 : 경찰 방어선이 삼청동·효자동의 청와대 진입로 초입까지 밀렸다(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경찰의 물대포와 소화기가 최초로 등장했다. 촛불의 ‘배후 세력’을 자처하는 ‘김밥부대’도 이날 대거 등장했다. 여대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머리를 짓밟히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여론은 폭발했다.
6월6~8일 : 72시간 연속집회. 광화문 일대 거리는 ‘국민 MT’ 장소가 됐다. 새벽까지 강연을 듣고 공연을 즐기며 촛불 주위에 둘러앉아 난상 토론을 벌이는 ‘희한한’ 집회 문화가 이날 탄생했다.
6월10일 : 그 유명한 ‘명박산성’이 등장했다. 촛불집회 최대 인파가 모였다(경찰 추산 8만명, 주최 측 추산 70만명). 변진경 기자는 동아일보사 앞에서 거리편집국까지 걸어서 1분 거리를 헤쳐 오는 데 15분이 걸렸다.
6월13일 : 촛불이 언론 이슈로 옮아붙었다. 광화문에 모였던 시위대가 갑자기 여의도 KBS로 향했다. 천관율 기자는 설마 정말로 여의도까지 가겠냐며 무심코 따라나섰다가 꼼짝없이 두 시간을 걸으며 정장에 구두 신은 걸 후회했다.
6월19일 : 이명박 대통령이 특별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자책’이라는 표현도 썼다. 당시에는 사과처럼 들렸다.
6월25~26일 : 25일, 잠잠하던 촛불이 다시 불붙었다. 오랜만에 물대포도 다시 등장했는데, 이날 이후로는 일상이 됐다. 26일에는 정부가 쇠고기 수입 고시 관보 게재를 강행했다. 시위대는 주말을 별렀다.
6월28일 : 촛불집회 기간 중 가장 격렬했던 충돌이 이날 벌어졌다. 시위대 300여 명과 경찰 100여 명이 다쳤다. 경찰은 “도심의 불법·폭력 시위를 끝내겠다”라며 기세를 올렸고 촛불은 그렇게 꺼지는 듯했다.
6월30일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시청광장에서 시국미사를 열었다. 가두시위를 절대로 불허하겠다던 경찰은 사제단을 따르는 촛불이 거리로 나서는 것을 바라볼 도리밖에 없었다. 7월3일에는 개신교계, 4일에는 불교계가 잇따라 기도회와 시국법회를 열었다. 종교계가 나서면서 분위기가 뒤집혔다.
7월17일 : 대책회의가 제헌절을 계기로 촛불집회를 이어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동력이 고갈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경찰은 물대포에 최루액을 섞어 발사하겠다고 밝혔다.
7월30일 :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성향의 공정택 후보가 ‘촛불 후보’임을 자처한 주경복 후보를 제쳤다. 2002년·2004년과 달리, 2008년의 촛불은 선거를 이기지 못했다.
8월15일 : 대규모 가두집회로는 마지막 촛불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색소를 탄 물대포를 쏘며 밤 11시를 넘기지 않고 시위대를 진압했다.
‘기동전’이 끝난 시대, 온라인에서는 ‘진지전’이 한창이다. 많은 커뮤니티가 정기 모임을 갖고 각종 집회에 참가하며 자체 MT를 조직하는 등 촛불의 인연을 일상으로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