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9월6일 서울 서초동의 서울고등법원을 나서면서 오랜만에 웃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유죄는 유지되었지만, 3년 징역형의 집행을 5년간 유예한다는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인신이 좀더 자유로워진 까닭일까.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정 회장은 “죄송합니다”를 몇 차례 연발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겸연쩍은 미소가 흘렀다.

항소심 판결 이후 정 회장은 공식 일정을 전남 여수에서 시작했다. 9월11일 여수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기 위해 내려간 것이다. 여수시는 그를 위해 ‘외국인에게만 명예시민증을 수여한다’는 시 조례까지 바꾸었다. 9월12일 이후에도 정 회장은 ‘여수를 위한 일’에 힘을 쏟았다. 2012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명예유치위원장 자격으로 9월12일부터 15일까지 서울과 여수를 오가며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해 세계박람회기구(BIE) 회원국 대표들을 대상으로 엑스포 유치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BIE 대표단 2백여 명을 환영하기 위해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마련한 오찬과 만찬 자리에도 그는 어김없이 얼굴을 드러냈다.

10월 초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참여한 후 중순부터 정 회장은 유럽과 중남미 출장에 나선다. 간간이 해외 공장 방문 일정이 섞이지만, 여수 엑스포 유치 활동이 주요한 출장 목적이라고 한다. 이 일은 항소심 재판부로부터 집행유예 선고를 이끌어낸 정상 참작 요소였다. 9월6일 결심에서 이재홍 재판장은 정 회장에게 여수엑스포 유치 명예위원장임을 물으며  “피고가 유치 활동을 나서는 모습이 신문에도 많이 보도되고 해서 나한테도 심리적 압박이 됐다. (평창)동계올림픽은 푸틴(러시아 대통령)으로 좌절되었지만, 이번에는 꼭 유치할 수 있도록 분발해달라. 그것도 이 판결에 충분히 고려를 했다”라고 말했고, 이에 정 회장은 굵은 목소리로 “예”라고 답했다.

현대차그룹이 판결 직후 재빨리 법원 기자실에 돌린 자료에도 강조되어 있듯이 정 회장은 이후 엑스포 유치와 중소 업체 간 협력 활동 등 긍정적 인상을 심기 위한 일정을 빼곡히 소화해야 한다. 9월19일 대통령이 주재하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에서 2012년 엑스포 유치국이 결정되는 11월26일까지 그는 나라 안팎을 뛰어다닐 수밖에 없다.  

정 회장은 항소심 공판 초기부터 “지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보답할 기회를 주면 반성하면서 규정대로 법대로 회사를 경영해 회사에 닥친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라며 선처를 호소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였지만 판결 후폭풍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그는 돈으로 죄를 탕감받았다는 비난에서 한동안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동정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싸늘한 반응 일색이기 때문이다. “‘상식의 율문화’가 법인데 이번 판결은 상식 있는 국민을 모욕하는 행위다” “대법원이 어떻게 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회장이 감방 간다고 회사가 망하고 대한민국이 망하냐?”, 심지어 법이 미쳤다는 비난마저 터져나왔다.

재판부도 인정하듯이 사재 헌납과 여수엑스포 유치 활동은 정 회장이 집행유예를 받는 데 정상 참작 요소로 작용했다. 이에 재계 한 관계자는 정부 차원의 지원 사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법부가 독립적으로 판단했다고 하지만, 정 회장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정무적 고려가 없을 수 없다. 사재 헌납도 그렇지만, 특히 여수 유치 건은 정부 차원의 필요가 컸다. 평창에서의 삼성 용도처럼 여수의 경우 현대차의 자금력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덕수 국무총리가 고문이었던 정 회장을 명예유치위원장으로 끌어들였고, 그의 집유 판결에도 한몫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현대차 홍보의 승리”

당초 현대차와 정 회장 변호인단은 2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되고, 이것이 확정형이 되면 개천절 사면도 가능하리라는 기대가 일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는 한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비롯해 경제인 중심으로 개천절 사면을 고려했다는데 단행 여부는 불투명하다(정 회장의 경우는 검찰이 상고함으로써 아예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항소심 판결 후인 9월7일 월스트리트 저널은 정 회장의 집행유예 선고 사실을 다루면서  ‘현대차 홍보의 승리’라고 냉소했다. 이번 판결에 현대차의 로비나 선전이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조국 교수(서울대·법학)는 영향을 주었다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현대차 그룹의 대사회 홍보가 ‘기업 범죄에 대한 엄벌이 기업을 죽인다’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이것이 국민 여론과 재판부에 직·간접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연합뉴스9월12일 서울 경희궁에서 열린 BIE대표단 만찬에서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명예유치위원장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왼쪽 두 번째)이 대표단과 인사하고 있다.
사실 이런 반응은 무리가 아니다. 출처와 정체는 불분명했지만, 기업인 가운데서도 유독 재벌 총수가 관련된 범죄가 일어났을 때 ‘단죄하면 기업과 국민경제가 죽는다’는 식의 경제위기론 이데올로기가 유포되어왔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통상 해당 기업은 잘못을 반성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공식 언급을 하는 한편으로 재계와 협력업체, 언론을 동원해 경제위기론과 M&A 위협론을 흘린다”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도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고 볼 수 있다. 회장이 구속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4월19일 대국민 사과와 함께 정 회장 부자가 소유한 글로비스 주식 전량(1조원 상당)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며칠 후인 4월22일에는 현대·기아차 협력업체를 끌여들여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게 했다. 또 며칠 후에는 경제 5단체장 탄원서가 검찰에 배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28일 정 회장이 구속 수감되자 이번에는 언론이 맹활약했다. 한 신문은 변호사 기고를 통해 “검찰이 환율 하락과 유가 급등 등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법과 경제 사이에서 법을 선택했다”라는 전혀 법률적이지 않은 주장을 실었다.

지난해 9월11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당내부거래 조사에 들어갔을 때에도, 올 3월23일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경제신문은 3월26일자에서 전경련 고위 관계자의 입을 빌려 “현대차는 삼성처럼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조직이 아닌 만큼 검찰 수사, 재판, 세무조사 등의 외풍에 휩쓸리다 보면 회사의 조직력이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질 수 있다”라고 보도했다. 또 현대차 임원을 통해 “현대차는 정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인데 지난 1년간 이런 강점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앞으로 1년간 이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현대차는 5~10년을 후퇴할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몇몇 신문은 현대차발 경제위기론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며, 현대차 임직원은 물론 재계 전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정 회장이 2심에서도 실형을 받는 상황이라고 노골적으로 법원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2심에서 경영에 복귀하지 못하는 판결이 나올 경우 현대차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원동력을 잃는다는 이런 주장은 과연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일까.

지난해 3월26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소속 검사와 수사관 백여 명이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와 글로비스 등 계열사에 대한 압수 수색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번 비자금 사건은 현대차그룹 경영에 큰 혼란을 준 것은 틀림없다. 정 회장이 단순한 오너가 아니라 경영을 한손에 틀어쥔 최고 의사 결정권자라는 점에서 미국 조지아 공장 착공식 같은 주요한 의사 결정이 줄줄이 보류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구속 62일 만에 보석 결정이 나기는 했지만, 범죄인 신분으로 말미암아 기업 활동에 적지 않은 제약을 받았다. 실제로 올 5월 정 회장은 브라질에 갔지만, 룰라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브라질에 가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하면서도 수모를 겪어야 했다. 출국할 때와 해외에서 움직일 때마다 건건이 사법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차질이 빚어져 로스앤젤레스 호텔에서 꼬박 하루를 묶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장 유고 상황을 의도적으로 외부에 과장되게 표출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현대차 사정에 밝은 재계의 한 관계자는 “회장이 구속되어 있는데, 멀쩡하게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모습을 보이면 어찌되겠나. 업무 마비 상황임을 극대화해야 판결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을뿐더러, 개인적인 안위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더라”고 주장했다.

현대차그룹은 그룹 안팎에서 지난 1년6개월 동안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과연 위기 관리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국내 2위 그룹에다 세계 6위 자동차 회사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빈약한 정보력에다 위기 대응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26일 검찰이 덮친다는 것을 그날 아침까지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며, 무방비로 당해 중요한 모든 서류를 검찰이 쥐고 있는 상황인데도 같은 그해 4월2일 회장을 미국에 사실상 ‘도피’시켜 검찰을 더욱 자극했던 것이 좋은 예다.

정 회장, 글로비스 주식 팔 수 없어 ‘난감’
압권은 검찰이 회장 구속을 시사하면서 급조한 ‘정 회장 부자 글로비스 주식 전량 기부’라는 자충수였다. 발표 전 당시 중국에 체류하던 정 회장에게 보고되었지만 또 다른 당사자인 정의선 사장에게는 사전에 협의는커녕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방송을 보고야 이 사실을 접한 정 사장이 경악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정작 심각한 점은 3대 외국계 주주가 문제삼는 등 법적 문제가 있어 국민에게 약속한 글로비스 주식을 팔 수 없다는 것인데, 현대차는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뉴시스정몽구 회장(오른쪽)이 지난해 11월 슬로바키아 질리아에 있는 기아차 공장을 방문해 직원을 격려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지난 1년6개월 동안 정 회장과 현대차그룹을 괴롭힌 이번 비자금 사건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제보에서 비롯했다. 검찰이 내사에  착수한 시점은 2005년 11월께. 검찰에 치명적인 제보가 날아든 근본 원인이 정 회장의 무원칙한 인사에 있다는 것은 현대차 관계자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뚜렷한 경질 사유 없이 아무 때나 이루어진 인사로 억울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정 회장에게 비수를 꽂았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차 인사와 관련해 정 회장의 ‘소나기식 인사’라는 독특한 인사 스타일도 문제지만, 경영 계파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 조직 구조를 지적하는 재계 관계자들도 있다. 1999년 정 회장은 부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삼촌(고 정세영 회장)이 경영하던 현대자동차를 물려받았는데, 정 회장이 원래 경영하던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과 현대차써비스 인력들이 현대자동차에 유입되었다. 이후 정 회장이 경영하면서 삼촌 치하에서 득세한 인물이 상당수 축출되고 이 자리에 대거 ‘MK 인맥’이 수혈되었는데, 지금은 ‘훈구파’가 된 이들이 정의선 사장 사람들로 분류되는 ‘신진 세력’과 암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폐해를 한 재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계파 간 자리 경쟁이 벌어져 파행 인사가 꼬리를 물었다. 거기다 인의 장막을 형성해 정 회장에게 정확한 정보가 올라가지 못했다.”

이제 정 회장은 고난과 시련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일까. 비록 보호관찰 대상이지만, 최악의 상황을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경영 상황도 호전되는 기미다. 올 들어 환율이 안정되고, 예상보다 영업이익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질적인 노사 관계도 개선되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그가 타개해야 할 위협 요인은 적지 않다. 우선 경영자로서 공격적으로 진출한 해외 공장들을 순항시키는 일이 그의 리더십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한 증권사 분석가). 중국 등 해외 공장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당초 6월 말에 끝내려던 국세청 세무조사가 여전히 진행 중인 것도 그를 적잖이 괴롭힐 것이다. 고액 추징으로 귀결된다면 후계 구도에 적신호가 켜질 수 있다.

무엇보다 정 회장을 옥죄는 것은 판결 후폭풍이다. 정 회장이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는지 매섭게 지켜보는 눈이 많다. 이른바 견제받지 않은 황제 경영과 무리한 경영권 세습이 경제 효율성 및 활력을 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질타가 많은 것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배구조 개선, 회사기회 유용 문제의 해소, 관련자 책임 추궁 등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면서, 만약 의지를 확인할 수 없을 경우 주주대표소송 제기 및 내년 정기 주주총회 참석 등 가능한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외부의 압력에 내몰려 마지못해 할 것인가. 스스로 결단해 실추된 기업 이미지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좋을까.  2007년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정 회장은 두 선택지를 받아 들었다.

기자명 장영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c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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