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잠을 설쳤다. ‘아, 이제 내일이면 해방이다. 밀가루로 만든 거,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런저런 음식이 떠올라 입 안엔 침이 고이고 머리는 맑아졌다. 자장면이 가장 먼저 스쳐갔다. 지난 한 달 동료들에게 이끌려 중국집에 갔어도 ‘우리 모두의 메뉴’ 탕수육과 자장면은 그림의 떡이었다. 중국집 가서 자장면 맛 안 보면 그거, 화장실 가서 휴지 안 쓰고 나온 거랑 비슷한 느낌이다.

기분 같아서는 기사 마감 하자마자 중국집으로 달려갈 것 같았지만, 선택을 달리했다. 찹쌀, 보리, 현미, 흑미, 콩이 들어간 잡곡밥에 정성을 듬뿍 담아 도시락을 쌌다. 후회할 것 같았다. 자장면, 튀김, 라면…. 먹기 전에는 안달 나지만 먹고 나면 후회하는 나의 단골 메뉴. 속은 더부룩 팽팽, 가스는 찼고 소화는 안 됐으며 연방 트림을 해대기 일쑤. 그런 유혹과 후회의 나날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밀가루 음식을 끊은 지난 한 달, 적어도 그런 불쾌감은 없었다.

당초 〈시사IN〉 기획회의에서 ‘밀가루 끊기’에 대해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효과가 당장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체험 기사로서 부적절한 아이템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밀고 나갔다. 공감대는 의외로 컸다. ‘식품 안전’에 대한 높은 관심을 실감했다.

거친 곡물이 내 몸을 살린다

통밀과 각종 곡류로 만든 빵. 질기고 거칠지만 씹는 맛이 일품이다.
독자 박소영씨(34·학원강사)가 〈시사IN〉 홈페이지에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다. “불임 부부라 한의원을 찾았는데 밀가루, 쇠고기, 돼지고기 먹지 말라 해서 3개월간 끊고 지낸 뒤 다시 밀가루 음식을 먹으니 몸이 바로 반응하더군요. 그나마 생협 우리 밀 제품이 반응이 덜하고요. 아마 기자님도 건강해지실 겁니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박씨는 ‘밀가루 마니아’였다. 부득불 약 때문에 밀가루를 끊었고 3개월이 지나자마자 바로 사흘 연속 밀가루 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그러고 바로 몸에 두드러기가 났단다. 밀 자체는 찬 기운이 많지만 겨를 벗겨낸 밀가루는 열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지난 한 달간 나는 밀을 멀리하는 대신 다른 곡물과 친해졌다. 고구마, 옥수수를 직접 쪄 먹고 검은콩으로 튀밥도 만들어 먹었다. 감자전분으로 만든 생협 라면은 면발이 덜 탱탱했지만 담백하고 소화도 잘 됐다. “비장과 위의 기능을 돕는 기장, 신장 활동을 돕는 조,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피, 몸의 열기를 제거하는 수수, 당뇨병에 효과적인 보리, 속이 든든한 호밀, 피부 질환에 효과 좋은 율무, 단백질 공급원 콩, 기력을 보강해주는 메밀, 다양한 요리에 응용할 수 있는 옥수수, 사계절의 기를 갖춘 밀, 동양의 콩, 팥….” 이 곡물들은 척박한 땅에서 자라나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거친 곡물이 내 몸을 살린다〉·하야시 히로코). 밀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문제는 밀이 아니라 밀가루다. 밀은 그 이름, 소맥(小麥)처럼 ‘겨울(冬)’을 딛고 일어나 ‘온(來)’ 것으로 의지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밀을 농약에서, 도정에서 해방시켜 질기고 거친 그 씹는 맛을 즐겨보자. 집에 가다가 ‘우리 통밀’ 빵이나 사야겠다.

※ 다음 호부터 ‘끊고 살아보기 5탄-인터넷 포털 사이트’ 편을 연재합니다.

기자명 박형숙 기자 다른기사 보기 ph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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