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체 뜨거운 시대였던 탓일까. 마지막 모습은 더 을씨년스럽다. 가장 열렬한 지지와 가장 극렬한 반대가 공존했던 ‘노무현 시대’가 결국 뇌물 스캔들로 막을 내리는 모양새다. 관광객을 맞이하고 동네를 산책하는 것을 즐기던 노 전 대통령 부부는 이제 봉하마을 사저에 가림막까지 치며 세간의 눈을 피하는 신세가 됐다.

대선과 총선이라는 두 차례 큰 선거에서 참패하고도 재기를 노렸던 친노 진영이지만, 노 전 대통령까지 얽힌 뇌물 스캔들은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다. 한 민주당 재선 의원은 “유권자가 욕을 할 때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제 친노의 부활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참여정부 집권기를 거치면서 친노는 정치에도 민생에도 무능하다고 철저히 찍혔다. 마지막 밑천이 도덕성이었는데 그것조차 부도가 나버렸으니 유권자가 시선을 줄 이유도 없다”라는 것이다.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전국 순회 국민경선부터 시작된 ‘노무현 시대’가 7년 만에 종착역을 앞두고 있는 셈이다. 한 시대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의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지난 7년, 노무현 시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비주류 정체성’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핵심 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드물다. 해양수산부 장관 직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2002년 대선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철저한 비주류였다. 고졸 학력이었고, 동교동 가신도 아니었으며, 당내에서조차 비주류인 영남 출신이었다. DJ의 깃발을 들고 연이어 부산 출마를 강행하는 ‘무모한 모습’도 보였다. 맞상대였던 이회창 후보가 어느 모로 보나 평탄한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던 것과 확연한 대조를 이뤘다. 많은 정치 전문가는 “2002년 당시에는 ‘이념’보다 ‘세대’가 훨씬 중요한 구분선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기성세대의 벽에 막혀 기득권에 진입하지 못하는 30, 40대 사이에서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상당한 수준의 합의가 존재했다. 그래서 ‘변화’가 2002년 대선의 시대정신이 됐고, 그 대변자로 노무현을 발견한 것이다”라는 분석에 동의한다. 공고하던 기득권 구조를 해체하려는 욕망이 마침 노무현이라는 ‘맞아떨어지는’ 대변자를 만나 폭발했다는 얘기다.

‘비주류 꼴통’에 대표성 위임하다

노무현의 승리는 ‘제도권 바깥’의 승리이기도 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정치학) 등 정당정치 이론가들은 국내 정당정치가 보수적 유권자를 지나치게 대표하고 진보적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는 취약함을 보인다고 되풀이해 지적했다. 광범위한 유권자들이 정당정치에 의해 대표되지 않는 탓에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유권자의 열망이 존재하게 되고, 이는 결국 한국 정치의 만성적 불안정 상태를 야기한다는 주장이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고, 2004년 대통령 탄핵, 그리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을 계기로 세 차례 폭발했던 촛불집회는 대표적인 사례다. 제도권 정치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유권자가 직접행동을 통해 제도권 정치를 뒤흔든 것이다.

흥미롭게도 촛불집회 국면마다 노무현 브랜드는 ‘떴다’. 2002년 촛불집회는 대선 국면까지 이어져 노무현 대통령 탄생에 일조했고, 여의도 권력에 맞선 2004년 촛불집회는 결과적으로 ‘노무현 구하기’를 수행한 셈이 됐다. 2008년 촛불집회 때도 추락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비교하는 ‘노무현 재평가’의 흐름이 존재했다.

“MB식 여의도 혐오증의 원조는 노무현”

보수 진영 일각의 주장처럼 “촛불집회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음모”였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정당정치의 대표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대중이 특정 인물에 정치적 욕망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대표성을 회복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노무현이라는 ‘비주류 꼴통’ 정치인은 기존 정당정치가 포섭하지 못하는 유권자에게 가장 유력한 동맹 대상이었다는 얘기다. 노 전 대통령이 한국 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강력한 개인 팬클럽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정당정치에서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정치적 열망이 노무현이라는 개인을 발견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시민의 모금으로 대선을 치르겠다는 의지를 담은 ‘희망돼지’는 ‘노무현식 대중동원’의 상징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노무현에 ‘베팅’한 대표적 세력이 수도권(지역)·중산층(계층)·30, 40대(세대)였다. 여기에 전통적인 반한나라 세력 기반인 호남 표를 더하면 ‘노무현 동맹’이 완성된다. 하지만 이 동맹은 정작 대통령 재임 기간에 철저히 와해됐다. 대북송금 특검수사와 열린우리당 창당을 거치며 호남표는 노무현을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 근본적인 현상은 개혁 성향 386과 수도권 중산층의 이탈이었다. 한 민주당 초선 의원은 “임기 초반에는 이라크 파병, 중반에는 대연정 제안, 후반에는 한·미 FTA를 연이어 던져대니, 지지자를 떠나보내려 작정한 것 같은 느낌까지 들더라”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실제로 이 의원이 나열한 세 차례 ‘대형 승부수’는 모두 자충수로 되돌아왔다. 성공회대 이남주 교수(정치학)는 공동저자로 참여한 〈노무현 시대의 좌절〉에서 “대연정이나 한·미 FTA 같은 ‘빅 아이디어’식의 해법은 지지 세력을 주변화·균열화해 전면적인 붕괴로 이어졌다”라고 짚었다. 안 그래도 이념적으로 이질적이었던 ‘노무현 동맹’을 묶어내기는커녕 스스로 나서서 해체한 것이 참여정부 정치적 실패의 핵심 원인이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더해 ‘부동산’과 ‘교육’이라는 민생 문제의 양대 핵심 과제에서 극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진보는 먹고사는 문제에 무능하다’는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지지층은 분열하는데 보수층은 ‘비토’를 더욱 공고히 하는 사면초가였던 셈이다.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는 “갈 곳을 모르던 정치적 열망에 출구를 열어준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집권 이후 그 출구를 제도화함으로써 안정시킨 게 아니라 사유화했다. 노무현이 사라지면 출구도 사라지는 구조가 돼버렸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정치학)는 노 전 대통령이 집권 기간 강조했던 당정 분리 원칙을 강하게 비판했다. “당정 분리라는 게 공천권을 쥐고 전횡을 하지 않겠다는 건데, 노 전 대통령은 아예 여의도와는 선을 그어버렸다. 정당이 여론을 수렴하는 기능을 무시한 셈이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보여주는 ‘여의도 혐오증’의 원조는 노 전 대통령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집권 당시 결정한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는 지지 세력과 참여정부의 연결고리를 산산조각 냈다.

친노 진영은 물론 할 말이 많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으로 일했던 한 핵심 참모는 ‘참여정부의 실패’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강하게 반발했다. “그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는 역주행이 길게 갈 것 같지도 않다. 지금 시민을 봐라. 검찰과 언론이 ‘역주행’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매우 예민하게 느낀다. 하지만 참여정부 이전까지 검찰과 언론을 청와대가 좌지우지하는 것은 다들 당연하게 생각했다. 검찰과 언론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시민도 확고한 감수성이 생긴 거다. 혹자는 왜 그때 이들을 ‘조지지’ 않았느냐고도 하지만, 그런 선례를 만들었다면 지금 이명박 정부는 더 거침이 없었을 것이다.” 이 참모는 대화 도중에도 “길게 봐야 한다”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노무현식 ‘원칙주의’가 당장은 외면받더라도 결국 인정받는 날이 온다는 의미로 들린다.
동원에 성공했지만 제도화에 실패하다

그날이 언제든, 적어도 당장은 이번 뇌물 스캔들이 진보·개혁 진영에 큰 시련이며 어떻게든 ‘노무현’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돌파할 수가 없다는 공감대만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민주당 초선 의원은 “이번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자민당이 55년을 장기 집권한 일본식 체제로 가지 말란 법이 없다”라고 걱정했고, 또다른 민주당 의원은 “그렇다고 호남 중심의 지역당 체제로 돌아가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다. 노무현을 극복하면서도 새로운 개혁의 구심점을 만들어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노무현 시대는 ‘제도권 밖의 정치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동원해냈지만, 집권 이후 그 열망을 제도권으로 포섭하는 데 실패한 시대’라고 요약된다. 제도권 밖의 열망을 성공적으로 동원해낸 경험이 자산이라면, 이들을 제도 안으로 포섭하지 못해 정치적 허무주의와 냉소를 일으킨 것은 부채다. 진보·개혁 진영에 급박하게 주어진 ‘노무현 극복’이라는 과제 역시 여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정해구 교수는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반MB 교육을 내건 후보가 당선했다. 기층에서 변화의 흐름이 꿈틀거린다는 얘기다. 이번에는 더디더라도 정치인 개인에게 모든 기대를 거는 대신, 제대로 된 제도화와 시스템을 통해 발밑부터 다지면서 전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시 찾아올 기회마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읽힌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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