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텔 토마토〉 정혜련 지음, 청어 펴냄

첫 창작집을 냈다면 그는 신인 작가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오피스텔 토마토〉의 작가 정혜련이 그런 경우다. 199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 작가는 무려 13년 만에 첫 창작집을 출간했다. 작가로서는 꽤 긴 세월을 침묵 속에서 보낸 셈인데, 소설을 읽다보면 그 침묵의 시간이 오히려 작가적 역량을 날카롭게 벼려나갔던 인내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 아홉 편 사이에 질적 편차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의 작품이 일상에 대한 여성 인물의 내면적 고뇌와 심리적 불안을 섬세하게 서사화하고 있지만, 요즘 소설에 서 흔히 접하는 감정 과잉이나 독한 에고이즘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견고한 일상의 안팎에 존재하는 희비극적 상황에 깃든 갈등의 복잡성을 거리를 두고 끈질기게 탐색하는 원숙한 시선이 돋보인다.

노년층을 능동적 인물로 그려

정혜련의 소설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노년의 삶에 대한 성숙한 탐색 태도이다. 한국 소설에서 노년의 삶이란 박완서의 경우를 제외하면 소설적 공간에서 극히 희박한 비율을 차지한다. 한국 소설에 묘사된 세계는 대부분 청년의 모험과 욕망으로 점철된 것이어서,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년 세대는 소외되어 있다.

근대 이후의 인간에게 늙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잉여 인간’이 된다는 것으로 표상되어왔다. 노년의 삶을 장악하는 소외와 와병과 죽음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인간 운명의 드라마는 그렇게 미끈한 문명화 과정 속에서 은폐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혜련은 〈컴퓨터의 집〉과 〈당신의 증거〉라는 탁월한 작품을 통해 노년에도 욕망은 결코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치매를 포함한 고통스러운 노화와 쇠락의 운명 속에서도 인간됨의 존엄과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삶의 투쟁은 오히려 더 강렬하다는 사실을 소설을 통해 감동적으로 증명한다.

정혜련의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젊은 인물이 추억과 회상에 수동적으로 젖어 있는 반면, 노년의 인물은 대개가 행동주의자라 명명해도 될 정도로 자기 운명에 대한 결단과 선택을 능동적으로 감행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회한에 잠긴 내성적인 젊은 축과 좌충우돌하는 행동주의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단하는 노년 세대에 대한 작가의 대조적인 시선은 이채롭기도 하고 개성적이기도 한 것이다.

기자명 이명원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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