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바라보다〉:2007년. 호박, 렌즈, 거울, 유리. 58.5×175.5×11cm
유럽의 초대형 성당들이 자랑하는 스테인드글라스와 로댕 갤러리의 글래스 파빌리온은 일광의 유입으로 실내를 숭고미로 충만케 하는 건축공학적 효과를 노린다는 점에서 같다. 공간 속에 놓인 대상은 숭고한 빛으로 표백되어 탈속화되어 보일 지경이다. 이곳에서 개최된 전시 가운데, 범속한 무정부주의적 상상력으로 제도 예술의 언저리를 가격한 박이소 유작전은 그 점에서 자기 모순적 한계를 노출한 반면, 이우환과 임충섭은 공간이 지닌 설계된 중후함과 처음부터 호흡이 잘 통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로댕 갤러리는, 삼성미술관이 지향하는 격조 높은 취향을 공간적으로 내면화한 전시장이다(이 점은 리움도 같다). 그러면 현재진행 중인 〈최재은-루시의 시간〉(로댕 갤러리 9월21일~11월18일)은 어느 쪽에 해당될까? 결과적으로는 후자에 근접하지만, 일정 부분 작가가 글래스 파빌리온이 요구한 격식에 자신의 형식미학을 조율하는 민첩성을 보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귀화를 거부한 일본 거주 한인 여성 작가 최재은은 이제 50중반에 들어섰다. 1999년 〈월간 미술〉의 설문조사 ‘한국의 차세대 미술가는 누구인가’의 2백53명 중에는 꼽혔으나, 활동 무대가 주로 일본이고, 전시 공간 외곽에서 남성적 스케일로 공공 조형물에 올인한 점 등, 한동안 국내 주류 화단으로부터 잊혀지는 감도 있었다.

그녀의 국내 마지막 활동도 2000년 다큐 영화로 기록되었으니, 공백 기간이 짧지만은 않았던 셈이다. 참고로 2000년 작 〈길 위에서〉는 오늘날 국민 배우로 성장한, 당시 14세 소녀 문근영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이번 출품작이 보여주는 단아하고 절제된 조형 감각은 과연 최재은의 것이지만, 그녀가 종래 실외에서 작가 전력을 쌓아왔던 완강한 기억이 굳어져서인지, 실내로 들어앉은 최재은을 쉽게 연상하기 어려웠다.

최씨는 20대 초반이던 1976년 의상 디자인을 배우러 일본에 갔으나, 예정에 없이 일본 전통 꽃꽂이 공예 이케바나를 접하면서, ‘공간과의 만남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를 만드는’ 테크닉을 익힌다. 또한 그녀가 수학한 소게쓰 회관은 정규대학은 아니지만, 당대를 호령한 실험 예술과 접할 기회가 잦아 그녀는 그 무렵부터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의 퍼포먼스,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데이비드 내시의 작업을 접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진술한 바 있다.

입구부터 천문학적 시간 여행

1990년 장충동 경동교회에 45일간 설치된 〈Synchronus〉는 그녀의 국내 최초 개인전으로 기록되는 데, 3000개의 대나무를 교회 건물 머리에 꽂은 형국이 마치 이케바나의 기교를 건축물에 연장시킨 인상이었다. 이 작품을 전후로 1988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과거-미래〉, 1994년 삼성의료원 〈시간의 방향〉, 1998년 합천 해인사의 성철 스님 사리탑 〈선의 공간〉 같은 굵직한 공공 조형물을 모두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시기적으로는 앞서지만, 1993년 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미술평론가 이용우는 그녀에게 “처세 또는 예술을 위한 주변 환경을 구성하는 데도 남다른 능력을 가진 게 아니냐”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최씨가 당시 내놓은 답변이 “외지 생활 17년의 생존 방법”이었으니, 참 당찼다.

어쨌건 그녀의 생존 전략과는 별개로 최재은은 삼성미술관의 환원주의적 미학 또는 도를 넘지 않는 윤리와 궁합이 맞는 측면이 있다. 국내외에서 쌓아올린 지명도, 국제 비엔날레 출품 따위의 개인 이력뿐 아니다. 종래 삼성미술관을 거친 초청 작가들과 대비해보면 겹치는 지점이 많아서다.

요컨대 파스텔 톤의 종이 다섯 점만 덩그러니 제시한 〈무한대의 시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숭고와 명상을 행하는 마크 로스코(2006년 6월 리움)의 화폭과 닮은 색면이고, 매장된 시간과 토질에 따라 변색된 종이들의 편차를 열거하면서 시간의 흔적을 확보한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는 모노크롬 추상화의 단조로운 형식미를 인종주의나 다문화주의 같은 시의 적절한 주제와 결합시켜 성공한 바이런 킴(2005년 3월 로댕 갤러리)의 〈제유법〉과 외관 이상의 공통점이 분명 있다.

〈루시〉:2007년. 한백옥. 239.5×246×291.4cm
그리고 최씨의 전작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시공에 대한 성찰과 관계성은 어김없이 이우환(2003년 10월 로댕 갤러리)의 관념적 미니멀리즘과 연관 짓지 않을 수 없다. 출품작마다 배어 있는 종교성은 글래스 파빌리온의 관념주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입구에서 관객을 맞는 세 개의 녹슨 철제 좌대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마사이 마라〉는 축소된 제단 같은데, 이후 전개될 반복적 양상에 대한 명시적 서곡이다.

전작들은 모두 홀수로 떨어지게 배열되어(네 개의 모니터로 구성된 〈희로애락〉조차 1대3으로 벽에 안배되었다), 정중앙성과 대칭미가 강조된 중세 종교 도상과 근친성이 있다. 경주와 후꾸이의 땅 깊이 매장한 종이를 수년이 지나 굴토하여 전시한 〈월드 언더그라운드〉 연작은 과거와 시간성 같은 추상적 가치를 구체적 감상 대상으로 붙들었는데, 유사한 시도가 미술사에서는 곧잘 관찰된다. 입구부터 시작된 천문학적 시간 여행은 마지막 전시 공간의 전시 제목이기도 한 ‘루시’를 만나며 종지부를 찍는다. 인류 최초 여성 호미니드로 알려진 루시(Lucy)의 골반을 형상화한 3m 높이의 설치물은 318만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감을 3t짜리 미백의 미니멀 덩어리로 숭고미를 부풀리고 있다. 그렇지만, 시선 고정을 유도한 작업은 내게 따로 있다. 사운드 설치와 백색 운모 가루를 살포하는 데 일주일이 소요될 정도로 작가의 자의식이 강박적으로 배어 있는 〈자신〉이 그것이다.

도판으로는 현장 느낌을 여간해선 복원하기 곤란할 만큼 장소 특정적 설치물이다. 〈자신〉은 배당된 ‘방’을 정중앙성과 대칭 미학, 그리고 순백으로 마감하고 반복적 초침 소리를 더해 관객을 압박하는 관념의 산물이 되었는데, 〈루시〉와 함께 최재은의 자의식, 혹은 로댕 갤러리의 공간적 품격에 맞추려 한 작가의 총력이 잘 녹아난 신작으로 나는 파악한다. 〈자신〉에서 대기로 울려퍼지는 초침 소리는 시간 미학을 선도한 미야지마 다쓰오의 ‘음성 있는 버전’ 같고, 백색으로 도포된 공간의 몰입성은 취지야 다를지언정 볼프강 라이프의 개암나무의 노란 꽃가루를 표백 처리한 것 같다.

이 난해한 시간예술 앞에 자신의 몰이해를 너무 탓하거나 속상해하지는 말길 부탁한다. ‘말 없는’ 예술이 시공이니 존재니 하는 관념을 논하는 순간 ‘말 많은’ 비평이 논박할 방도란 사실 전무해서다. 비평가도 일치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고약한 구석이 있어서다. 흑백으로 제약된 색채 감각, 최소화된 구조물, 정중앙성과 좌우대칭에 전념한 종교적 도상은 더 심한데, 최재은이 그런 경우여서다.

생명성과 시간의 개념에 주목한 것으로 소개된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홍희(현 경기도미술관장)는 1993년, “전통적 이젤 페인팅의 허구에대한 도전”이라는 정반대 이유를 들어 호평했으니, 지지와 해석도 때에 따라 이렇듯 상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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