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김광식 지음, 새싹 펴냄

우리 불교계에서 춘성 스님(1891~ 1977)만큼, 그에 얽힌 갖가지 소문과 ‘전설’이 널리 유포된 스님도 드물다.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에서 열린 자신의 생일잔치에 춘성 스님을 초청해 법문을 부탁했다. 스님이 설법할 차례가 되었지만, 스님은 10여 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몸을 비틀기 시작할 무렵 스님은 주장자로 법상을 치며 말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어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 하고 보지에서 나온 날이다.”

진관사 대웅전 상량식에 즈음해 법사로 초청받은 춘성 스님은 여느 때처럼 양복을 입었다. 그 차림으로 법상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어서 진관사에서 키가 제일 큰 비구니의 장삼을 입었지만, 체구가 장대한 춘성 스님의 종아리에도 못 미쳤다. 일종의 미니 장삼을 입고 법상에 오른 스님은 몇 분간 묵언하다가 입을 열었다. “혼수에는 좆이 제일이요, 불사에는 돈이 제일이다!”

3·1운동 이후 만해 한용운이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 춘성 스님은 서울 외곽 망월사에 거처를 정하고 서대문형무소를 드나들며 만해를 정성껏 시봉했다. 스님은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냉골 방에서 참선하며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땔감이 가득한데도 불을 때지 않는 까닭을 묻자 스님이 답했다. “스승이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한테 붙잡혀 서대문 감옥의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제자인 제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만해의 ‘조선 독립 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1919년 11월4일자)에 실린 배경에는 춘성 스님의 역할이 컸다. 만해가 휴지에 글을 써서 똘똘 말아 종이 끈으로 만든 뒤, 그것을 옥 밖으로 내보내는 옷의 갈피에 숨겨 춘성 스님에게 전달했던 것. 스님은 항일 불교 청년운동을 하며 만해를 따르던 범어사 승려 김상호에게 문건을 전달했고, 김상호는 이를 군자금 보내는 불교계 비밀 루트를 거쳐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했다.

걸망, 죽비,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 그리고 팬티 하나만을 남기고 입적한 춘성 스님의 삶을 복원해놓은 이 책은 백담사 만해마을 김광식 연구실장의 각별한 노력 덕분에 세상 빛을 보았다. 그는 2년간 춘성 스님에 관한 다양한 문헌 자료 검토는 물론, 스님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증언을 채록했다. 춘성 스님의 유언은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스님은 이렇게 일갈하지 않을까 싶다.

“이놈들아, 똥 막대기만도 못한 책 하나 잡고 뭘 하려는 거냐!”

스님의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이 책을 계속 읽지 않을 수 없다.

기자명 표정훈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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