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발매된 ‘장기하와 얼굴들’(사진)의 정규 앨범 1집은 한 달 만에 2만 장 넘게 팔렸다.

‘500장만 팔리면 많이 팔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음반이 발매한 지 한 달 만에 2만 장 넘게 팔려버렸다.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앞두고 벌어진 온라인 투표에서는 인기 절정의 아이돌 태양(그룹 ‘빅뱅’의 멤버)을 제쳤다. 서태지·심수봉과 같은 무대에도 섰다.

‘인디계의 서태지’라 불리는 장기하(27).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리더인 그가 거둔 “기이한 성공” “기이한 팬덤”(음악 평론가 차우진)에 사회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애초에 출발은 여느 인디밴드와 같았다. ‘알바’ 뛰어 먹고사는 틈틈이 홍대앞 클럽에 서고, 데모 테이프 만들고, 녹음하고. 그러다 소문 좀 나고. 지난해 9월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한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급기야 ‘장교주’라는 별칭까지 얻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20대 누리꾼들의 엽기 또는 키치 취향이 발굴한 ‘4차원 스타’에 지나지 않았다. 진지한 노래 가사와 따로 노는 ‘촉수춤’ ‘문방구 선글라스’를 낀 채 막춤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이면서도 결코 웃는 법이 없는 코러스 걸(미미 시스터즈) 등 무대에서 보인 우습고도 독특한 퍼포먼스가 그의 인기 급상승 비결이었다.

‘장기하 전도사’ 자처하는 중년 남성

그런데 해가 바뀌면서 장기하에 대한 관심은 모든 세대로 확장되는 추세다. ‘장기하 현상’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특히 흥미로운 것이 30~40대의 합류다. 장기하 음반을 낸 붕가붕가레코드 고건혁 대표(29)는 “YES24 등에서 판매된 음반 통계를 보면 20대가 가장 많이 구입했으나 팬클럽 가입률로 따지면 30대가 꾸준히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최근 방송국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한눈에 봐도 ‘사회부 기자스러워’ 보이는 보도국 ‘아저씨’들이 방송사 복도에 나타난 장기하를 둘러싸고 “저, 장기하씨 팬이에요”를 연발하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 지난 3월11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열린 장기하와 얼굴들 팬미팅에 참석한 45세 남성은 그날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내 인생에서 (참가한 팬 사인회는) 장사익씨 팬 사인회에 이어 두 번째다. 장사익씨 CD는 100여 장을 사서 지인에게 선물했는데 장기하씨 음반은 200장을 넘기겠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늙은 사람까지 ‘장기하 전도사’로 만드는 내공”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일단 30~40대도 ‘알아먹을 만한’ 복고적 음악풍의 영향이 크다. 1970~1980년대를 풍미한 신중현·산울림·송골매 등의 영향을 받았음을 장기하는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대학원생 강혜원씨(26) 말마따나 386세대가 ‘트렌디한 척’하느라 장기하를 소비할 수도 있다. 요즘 386 ‘먹물’들의 술자리에서 장기하는 〈워낭소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안줏거리가 됐다. 

그러나 이들이 장기하에 끌린 데는 무엇보다 노랫말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중론이다. 자유기고가 유선주씨는 “‘싸구려 커피’의 가사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기억에 선명하다”라고 말했다. 누추한 자취방에 누워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라고 노래하는 비루한 청춘의 독백이 가슴에 와 박혔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기하는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20대 루저(loser·패배자)들의 정서를 정제된 우리말로 표현해낼 줄 아는 뮤지션’이라는 평을 듣는다(지난해 11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장기하는 “노래 가사를 만든 배경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다”라면서도 일각의 ‘과잉 해석’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는 드문 능력이다. ‘청춘의 종언’이라는 주제로 열린 계간 〈문학동네〉 2008년 겨울호 좌담에서 김홍중씨(대구대 사회학과 전임강사)는 20대를 ‘언어를 상실한 세대’로 규정했다. 블로그나 사적 담화를 통해 ‘토킹’ 방식으로 말할 줄은 알아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스피킹’은 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20대라는 얘기다. 이 자리에 참석한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씨는, 유럽 20대와 달리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한국·일본 20대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20대가 이너서클에서만 소통되는 ‘옹알이’와 ‘푸념’으로 일관하는 동안 이들에 대한 몰이해는 더 깊어갔다. 자유기고가 김현진씨 말마따나 모두에게 욕을 얻어먹는 세대가 이들 20대다. 이 와중에 20대는 문화 영역에서도 잊혀갔다. 김홍중 교수는 “과거에는 20대의 감수성이 문화를 이끌어간다는 전위의 느낌이 강했던 반면 요즘은 그런 게 약해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소비층으로 매력도 사라졌다. 소수 마니아만이 열광하던 〈메리대구 공방전〉(2007) 〈얼렁뚱땅 흥신소〉(2007) 이후, 더 직접적으로는 청춘 배우 송혜교·현빈을 내세운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의 참담한 실패 이후 20대 이야기를 다룬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위)는 ‘〈88만원 세대〉의 연극 버전’에 가깝다.

드라마는 더 이상 전파를 타지 않는다. 20대가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드라마를 만들 유인이 떨어져 그렇다는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평론가 이영미씨 지적대로, 작심하고 기획하면 인터넷에 빠져 있는 10대라도 얼마든지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꽃보다 남자〉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장기하라는 존재는 그래서 더 돋보인다. 연극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를 쓰고 연출한 김재엽씨(36 ·세종대 교수)는 “문화라는 건 결국 솔직함이다.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다른 이들도 공감하는 순간, 그게 세대 의식이 된다”라고 말했다. 물론 문단이나 영화·인디 음악계에 자기 목소리를 내온 20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그렇지만 장기하는 이를 대중적으로, 다른 세대와 소통케 하는 데 그 누구보다 성공했다.

소통 방식뿐 아니라 콘텐츠 또한 주목할 만하다. 김현진씨는 〈문학동네〉 좌담에서 지금 20대를 관통하는 코드는 딱 하나 ‘겁에 질려 있다’는 점이라고 지목했다. 대한민국의 1%를 뺀 나머지 99% 20대’는 가방 끈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좌파·우파에 상관없이 ‘이러다 영원히 낙오하는 것은 아닐까’ 겁에 질려 있다. 그런가 하면 상위 1%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는 그들대로 ‘나보다 잘난 놈이 있겠지’ 하는 두려움에 떤다.

조한혜정 교수(연세대·사회학)는 “겁에 질려 있으면 문화적 상상력을 꽃 피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겁에 질린 문화는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어머니 자궁으로 퇴행하거나,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거나. 〈엄마를 부탁해〉(신경숙)로 상징되는 최근의 ‘어머니 열풍’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막장 드라마’는 후자 경향을 대표한다. 〈꽃보다 남자〉 〈아내의 유혹〉은 리얼리티를 완벽하게 제거한 채 욕망의 판타지를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장기하는 달랐다. 현실을 얘기하되 겁먹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냉난방 잘되는 사무실에서만 일하려 한다”라고 대통령이 질책하든 말든 그는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방바닥에 누워 ‘고여 있는 물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는 무기력한 상태임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싸구려 커피’). 그래도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단다.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겠지만,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겠지만(‘별일 없이 산다’). 관조와 풍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도발적으로 읽히는 정치적 알레고리도 구사한다. 만화 평론가 김낙호씨가 ‘우리 시대의 송가’로 꼽은 ‘아무것도 없잖어’ 같은 곡이 그렇다. ‘선지자가 나타나서 지팡이를 들어//풀이 가득 덮인 기름진 땅이 나온다길래/죽을똥 살똥 왔는데/여긴 아무것도 없잖어//푸석한 모래밖에는 없잖어 (중략) 이건 뭐 완전히 속았잖어/되돌아갈 수도 없잖어.’

한쪽에서는 장기하의 담담함이 ‘관념적 루저’라는 그의 실체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루저의 정서를 노래하지만 장기하가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대변되는 진짜 루저는 아니라는 것이다. 〈88만원 세대〉 공저자인 박권일씨는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생이라는 게 장기하를 어정쩡한 존재로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차라리 2류 대학에 다니는 스테레오 타입 대학생이 ‘싸구려 커피’를 불렀다면 더 강력한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블로거 ‘캐즘’은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실제 루저가 되기는 싫다”는 욕망 내지 탈락에 대한 공포를 장기하 현상에서 읽어낸다.

주류 판갈이는 쉽지 않을 듯

장기하가 결코 주류가 될 수는 없으리라는 전망이, 장기하 현상이 갖는 파괴력에 대한 가치판단을 망설이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주류 문화가 장기하를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공중파에 진출한 인디밴드가 생방송 중 화면에 침을 뱉는 따위 ‘사고’를 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야성을 잃고 주류 질서에 동화하면 동화하는 대로 생명력이 끝나는 것이 장기하가 처한 딜레마이다. “주류에 올라서지 못하는 한 ‘판’을 바꿀 힘이 생기지는 않는다. 서태지는 의식적으로 주류를 선택해 판갈이를 한 경우지만, 장기하는 다르다. 정치사회적 격변으로 한국 사회에 큰 동요가 생긴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지지부진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장기하의 힘이 오래가기는 어렵지 않겠나.” 이영미씨는 말한다.

그럼에도 장기하에 쏠린 관심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흐름을 읽게 한다. 박권일씨 지적대로 ‘문화 권력을 지닌 386’이 장기하 현상을 증폭시켰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진짜 생활에 찌들어 사는 애들은 소녀시대 ‘Gee’를 듣지 장기하를 듣지는 않는다”라고 대학원생 강혜원씨는 말했다. 그러나 장기하가 노래하는 루저의 감성을 특정 세대·계층만이 누린다고 보기도 어렵다. 30대인 유선주씨는 “장기하 노래를 듣다 보면 ‘딱 내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괴리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한때 루저 정서는 20대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청년 실업이 만성화하면서 20대는 반항·도발·상상력·순수·열정 따위 과거 청춘의 특권을 반납하는 대신 무기력함·희망 없음·만성 불안 따위 루저의 정서를 내면화했다. 문제는 이것이 더 이상 20대만의 정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달의 바다〉를 쓴 소설가 정한아씨(27)는 ‘희망이 사라진 현재 루저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며, ‘20대=루저 내지 백수’라는 등식을 들이대는 것이야말로 폭력이라고 말했다.

전세대·전계층으로 확산된 박탈감

청년실업을 넘어 바야흐로 전방위적인 대량실업·만성 실업의 시대가 열린 판이다. 문학평론가 정준영씨는 격월간지 〈플랫폼〉 1~2월호에 실린 글에서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고 진단했다. 그나마 10년 전 외환 위기 때는 ‘이 고비만 넘기면 나아질 날이 오겠지’라는 낙관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 위기가 촉발한 충격과 공포는 이 알량한 자위의 행위조차 한순간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정씨의 말마따나, 반토막이 나버린 펀드 잔고는 우리가 믿었던 밧줄이 그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작가는 장기하를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히어로’라고 부른다. 현실을 직시하되 겁먹지 않고 담담한 그의 노래가, 아무런 희망도 안전망도 없이 ‘완벽히 무장해제된 채’ 위기에 내던져진 우리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문득, 위로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장기하가 20대를 대변하는 ‘세대적 아이콘’인 동시에 위기의 2009년을 되비추는 ‘시대적 아이콘’인 이유가 여기 있다.

기자명 김은남·이오성·박근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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