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나이트〉 커트 보네거트 지음 , 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잭 런던 걸작선'과 커트 보네거트의 장편소설 사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런던의 국내 초역 작품 둘 중 하나와 보네거트의 세 번째 작품을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추가 보네거트 쪽으로 기운 것은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인 하워드 W. 캠벨 2세의 헌사가 눈에 들어와서다. 캠벨 2세는 자신의 고백록을 마타 하리에게 바친다. 알고 보니 이건 겉치레였다.

〈마더 나이트〉 자체나 다름없는 ‘하워드 W. 캠벨 2세의 고백록’은 헌사가 말해주듯이 첩자의 이야기다. 고백록은 산만하게 자기 변명으로 흐르기 쉽고 스파이 소설은 눈속임과 극적 반전이 있기 마련이나, 〈마더 나이트〉는 단순 명백하다. 다만 역설의 뒤범벅은 주의를 요한다.

그 누가 하워드 캠벨에게 바치는 편집자의 헌사보다 더 적절하게 이 유능한 간첩의 실체를 묘사하랴! “그는 너무나 공공연하게 악에 봉사하고 너무나 은밀하게 선에 봉사했다.” 공공연한 악은 나치 독일이다. 미국 출신으로 독일에 정착한 극작가인 캠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영어권에 나치를 알리는 선전가로 크게 활약한다. 하지만 그의 실체는 미국 첩보원이었다. 캠벨의 장인만이 그의 정체를 눈치챌 정도로 그의 연기력은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또 한 사람, 어린 처제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그는 ‘미국 간첩’이라는 처제의 혀 짧은 부름에 깜짝 놀란다. 전쟁이 끝나자 캠벨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세계 ‘꼴통’ 이념의 산실, 다르게 표현하면 ‘진실의 원천’이 되어 있었다.

1961년 세상에 알려진 캠벨과 아돌프 아이히만은 가공인물과 실존 인물이라는 차이점 말고도 여러모로 비교된다. 아이히만이 1960년 5월 은신처였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들에게 붙잡혀 압송됐다면, 캠벨은 제 발로 이스라엘 법정에 선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판이한 견해를 보인다. 아이히만은 일개 군인으로서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반면 캠벨은 진정 ‘반성’하는 첩자다.

커트 보네거트는 블랙 유머의 대가답게 은근히 독자를 배꼽 잡게 한다. 그런 장면 하나를 보자. ‘암흑 시대에 빛나던 등대’와 ‘할렘의 흑인 지도자’가 나눈 대화다. “일본이 수소폭탄을 어디에 떨어뜨릴까요?” 내가 물었다. “중국이요. 틀림없소.” 그가 말했다. “다른 유색 인종에게 말이요?” 로버트는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중국 놈이 유색 인종이라고 누가 그럽디까?” 〈마더 나이트〉 혹은 ‘하워드 W. 캠벨 2세의 고백록’은 한번 손에 쥐면 내려놓기 어려운, 흡인력 강한 이야기다.

기자명 최성일 (출판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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