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10월24일 보수단체의 장외 집회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한창 때 흔히 ‘창(昌)’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이름에서 한 글자를 뗀 이른바 이니셜 같은 호칭일 텐데,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말에서 묻어나는 창(槍)의 뉘앙스를 즐기곤 했다. 이 전 총재의 또다른 별명은 ‘대쪽’이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원칙과 도덕성의 화신처럼 비추어졌다. 그의 행동이 그랬고, 그의 말이 그랬다. 그가 두 차례나 대통령이 되는 데 실패했던 이유는 그런 이미지에 결정적인 상처가 났기 때문이었다.

5년 전, 대선에서 패배한 지 하루 뒤인 2002년 12월20일 그는 정계 은퇴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국민의 선택을 받는 데 실패했고, 여러분의 선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법과 원칙을 세우는 게 소원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덧붙였다. 이후 5년 동안 그는 ‘창밖의 남자’였다. ‘창사랑’ ‘충청의 미래’ 같은 팬클럽의 골수 회원들이 틈만 나면 이름을 연호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던 그가 대선을 코앞에 둔 국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미 말의 정치를 시작했다. 몸도 곧 움직일 태세다. 그의 행보가 워낙 기습적이어서, 마치 문을 놔두고 창(窓)을 넘어서 방 안으로 틈입해오는 꼴이다. 과거의 이 전 총재답지 않은 행동 패턴에 정치권 전체가 놀라고 있다. 대선 판세가 요동치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를 잘 아는 이들은 그의 행보가 전혀 기습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과거 최측근이었던 윤여준 전 의원은 수개월 전부터 조심스럽게 이 전 총재의 출마 가능성을 예견해왔다. 가족과 측근이 부추긴다는 소문이 여의도 안팎에 파다했다. 무엇보다 이 전 총재 자신의 뜻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대선 이후까지 그를 보필했던 한 측근은 “이 전 총재는 한동안 대선에서 실패한 생각을 하면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억울해했다”라고 전했다.

1년 전부터 '대권 3수' 모색

첫 조짐은 1년여 전에 있었다. 지난해 12월6일, 이회창 전 총재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나타났다. 한나라당 중앙위원회가 주관한 초청 강연 자리였다. 그가 당 공식 행사에 참석한 것은 4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는 이날 대선 패배에 대한 송구함을 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지만, 그의 연설은 정확히 한나라당의 약한 고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이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호남 표 얻으려 햇볕정책에 아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는 이날 한나라당 국회의원 10여 명이 포함된 당원들로부터 열네 차례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강연 직후 ‘이회창 대권 3수설’이 퍼졌다. 그는 침묵했다. 측근들은 확대 해석에 선을 그었지만, 딱 부러지게 부인하지는 않았다. 소문은 거의 한 달을 갔다. 장고한다는 것은 마음이 동한다는 뜻이었다. 이 전 총재는 원래 스스로 결정한 뒤 여론 동향과 주변 의견을 살피는 스타일이다. 그는 뜸을 들인 끝에, 2007년 1월1일에야 입을 열었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 대선 불출마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불출마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최근 그가 “아직까지 종전 태도에 변함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종전 태도’가 이날 기자회견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몇몇 매체에서 조사한 그의 지지율은 3.4~3.8% 였다. 정계 복귀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응답이 70% 안팎이었다.

그로부터 열 달이 흘렀다. 이 전 총재가 다시 돌다리를 두드렸다. 이번에도 말이 먼저였다. 지난 10월19일, 그는 국가디자인연구소 개원 1주년 세미나에 참석해서 기조연설을 했다. 미리 배포한 연설문에는 ‘변환기 시대를 대비한 새로운 국가 디자인과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내용은 대체로 평이했고 원론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두 문장이 청중들의 귀에 걸렸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경제 강국이란 말을 들어도 거짓과 허장성세가 판을 치고 정직하게 원칙과 룰을 지키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사회는 후진국이지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정직이 시대의 요구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말이다’ ‘아니다’ 정도의 설왕설래 수준이었다.

소문이 뼈대를 갖추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월24일 이 전 총재는 보수단체들이 공동 주최한 대중 집회에서 연설했다. “현실 정치에서 떠나 있었지만, 여러분과 함께 몸을 던져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가진 첫 번째 장외 연설에서 이렇게 말문을 튼 그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든 보수 단체 회원들을 향해 본격적인 정치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위협받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흔들리는데도 정치권이 대선에서 표를 의식해 몸조심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수호 세력은 모두 단결해 자유민주주의 정체성과 나라의 기반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자. 신뢰받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자.”

박근혜 전 대표가 지지할 가능성은 아직 적어

닷새 간격으로 행한 그의 두 차례 연설문을 체로 걸러내면 ‘정직’과 ‘정체성’이라는 두 단어가 남는다. ‘정체성’이 지난해 말 세종문화회관에서 했던 연설과 맥락이 닿아 있는, 그가 오랫동안 궁구해온 정계 복귀 명분의 고리라면, ‘정직’은 현실적인 장애물인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을 공략할 카드였다. 보수파 지지 군중들이 모인 집회에서는 정체성 문제를 건드리고, 여론 주도층이 모인 세미나 장소에서는 지도자의 도덕성 문제를 건드린 것 또한 전략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전 총재가 무엇으로 자신의 대선 출마 장애물을 통과하려 하는지가 이로써 분명해진 셈이다.

이때부터는 수위 조절과 출마 선언 택일만이 문제였다. 이 전 총재의 발언 수위는 “아직까지 종전 태도에 변화 없다”(10월20일)에서 “차일시피일시”(此一時彼一時 :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로, 그리고 “앞으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10월30일)로 점차 진화했다. 그의 발언이 전해질 때마다 정치권에서 ‘이회창’이란 이름 석 자는 점점 현실적인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 초 현재, 정치권은 그의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전 총재의 측근인 정인봉 전 한나라당 의원은 11월2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출마 가능성이 100%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백승홍 전 한나라당 의원(창사랑 전 대표)은 ‘한나라당 탈당과 창당, 이후 다른 정파와의 합당을 거친 대통령 선거 독자 출마’라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했다.

ⓒ시사IN 윤무영한나라당 초선 의원들이 11월2일 긴급 회동을 가진 뒤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불출마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의 피 말리는 한 달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통령 선거일까지 남은 시간은 40일 남짓. 이번에는 혼자만의 장고로 끝냈던 지난해 겨울과는 분명 다르다. 공식 출마 선언을 하기도 전에 지지율이 20%대를 넘어섰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누르고 2위로 올라선 결과가 연달아 발표되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김경준 전 BBK 대표의 귀국이 확정되면서 이명박 대세론이 안개 속으로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최근의 상황 전개는 분명 그에게 유혹적이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모든 것이 지뢰밭이다. 우선 날벼락을 맞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측의 파상공세를 막아내야 한다. 이방호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11월1일 오후 긴급 기자간담회를 자청하더니 “최병렬 전 대표의 수첩에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다”라면서 대선 잔금 문제를 거론했다. 이 전 총재 측에서 ‘막가파식’ ‘제 얼굴에 침 뱉기’라고 격앙할 정도로 비수를 들이댄 셈이다. 1년 전 이 전 총재의 연설을 들으며 기립 박수를 보내던 초선 의원들은 11월2일 그의 불출마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전 총재 측은 ‘반이명박’ 세력의 구심 역할을 하는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를 기대하지만, 박 전 대표가 그를 지지할 가능성은 현재까지 거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10년 전 DJ보다 한 살 많은 일흔둘

보수층은 이회창 쓰나미의 진앙이었다. 이명박을 보는, 그리고 이회창을 부른 보수층의 정서는 ‘불안감’과 ‘불만’으로 대표된다. 이명박 후보가 낙마할지 모른다는 이른바 ‘스페어 후보론’이 불안감의 표현이라면, “행동하는 보수를 ‘극우’라고 부르면서 새로 얻은 애첩(중도표)만 아끼다가 본처(정통 보수)가 가출하게 생겼다”라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의 글은 이들의 불만을 대변한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의 낙선을 초래해 정권 교체를 저지할 수 있다”(이동복 전 의원)라는 우려 또한 상존한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이 언급한 ‘이회창 출마 범여권 공작설’은 이들 보수층의 우려를 겨냥한 발언이다.

지지율 3위로 떨어지면서 자칫 대선 경쟁 구도에서 밀려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측도 이 전 총재가 공식 출마 선언을 하는 즉시 포문을 열 예정이다. 그의 대선 ‘끼어들기’에 불편해하는 보수 언론의 흠집 내기도 견뎌내야 한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그의 지지율이 급상승한 반면, 출마 반대 의견도 여전히 줄지 않는다. 이 전 총재가 보수층에게 확실한 대안으로 인식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또 이명박 후보가 네거티브 공세를 견뎌내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의 지지율이 급속히 재조정될 수 있다.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이 전 총재는 아직 ‘이명박 종속변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난관을 모두 극복하고 그가 올해 대선 정국의 주체적인 독립 변수로 설 수 있을까. 결과는 물론 그의 정치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는 과거 3김과 맞서면서 ‘정치 초단’ 급으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한때는 “프로급을 넘어서 정치 10단 정도 되는 술수를 피고 있다”(안동선 전 의원)라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일흔둘. 10년 전 김대중씨가 대권 4수에 뛰어들 때의 나이가 일흔한 살이었으니까 그보다 한 살 많다. 물론 그가 역대 최연장자는 아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출마했을 때의 나이가 여든다섯 살이었다.

기자명 안철흥 기자 다른기사 보기 ah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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