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지난 3월7일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버튼을 선물하는 모습.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3월7일 저녁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접대할 때 벌어진 일이다. 라브로프 장관과 나란히 식탁에 앉은 클린턴 장관은 전채 요리가 나오기에 앞서 ‘peregruzka’라는 러시아 단어가 새겨진 빨간 플라스틱 버튼을 그에게 건넸다. 이 러시아 말이 ‘재설정(reset)’이란 뜻이라고 전해들은 클린턴 장관은 전임 부시 행정부 시절 꽁꽁 얼어붙은 미·러 관계를 다시 설정하자는 취지에서 이 단추를 라브로프 장관에게 선사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확한 러시아 단어를 찾느라 애썼는데, 맞다고 보느냐?”라며 농담조로 물었다. 그러자 라브로프 장관은 “사실은 틀렸다. 그 말은 ‘과부하’란 뜻이다”라고 가볍게 맞받아쳤다. 순간 당황한 클린턴 장관은 “러시아가 앞으로는 우리한테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겠다”라면서 웃으며 받아넘겼다.

클린턴 장관이 취임 후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라브로프 장관과 주고받은 이 같은 농담은 부시 행정부 때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지난해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이 라브로프 장관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미소는커녕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클린턴과 라브로프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은 사실 자체만으로 냉랭한 미·러 관계가 금방 풀리리라 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적어도 부시 행정부 때와 같은 최악의 관계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 높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돕는 러시아

실제로 이번 회담에서 양국 외무장관은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 배치 문제와 이란에 대한 러시아의 미사일 지원 문제, 올 12월5일이면 만료되는 1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연장 문제 등을 논의하면서도 해결에 자신감을 나타낸 점이 예사롭지 않다. 클린턴 장관은 특히 전략무기감축협정과 관련해 “올 연말까지 재연장에 관한 합의를 꼭 이루겠다”라고 말했다. 라브로프 장관도 “우리가 충분히 힘을 합하면 전략무기감축협정과 미사일 방어망 문제에 관해 도움이 되는 방안을 내놓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 때까지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지내던 미국과 러시아가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기가 무섭게 화해와 협력의 움직임을 보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양국이 서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다급한 쪽은 미국이다. 실제로 테러와 전쟁을 벌이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문제, 핵개발을 추진하는 이란, 나아가 동유럽에서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 문제 등을 해결하려면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하다.

 현재 러시아가 당장이라도 협조할 수 있는 대목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문제다. 오바마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 중심을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미 옮겼고, 올해 이곳에 1만7000명 넘게 증원군을 배치할 태세다. 문제는 엄청난 미군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안전하게 수송하고, 각종 보급품을 지원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은 지금까지는 궁여지책으로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으로 병력을 수송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수송로 곳곳에서 파키스탄 반군의 공격을 받고 차질을 빚어왔다.

그러나 최근 미군 보급품을 실은 열차가 냉전 시절 옛 소련 일원인 라트비아의 리가 항구를 출발해 러시아 국경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이런 협조는 부시 행정부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국은 앞으로 여러 달 동안 러시아의 협조 아래 미군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열차 수백 대를 운행할 방침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종전의 냉전 관계에서 벗어나 해빙기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 구체적인 신호다.

러시아가 오바마 행정부를 돕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러시아는 부시 행정부 때부터 추진해온 동유럽에 대한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오바마 행정부가 철회해주기를 기대한다. 러시아는 특히 오바마 행정부 등장을 계기로 미국이 이 문제에 관해 신축적 태도를 보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대목은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 러시아 측에게 이란 문제에 협조하는 대가로 미사일 방어망 구축 작업이 중단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이 서한은 윌리엄 번스 미국 국무부 정무담당 차관이 최근 러시아 정부 측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한의 골자는 이란으로 하여금 핵개발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도록 하는 일에 러시아가 협조할 경우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Reuters=Newsis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위) 수를 1만7000명 이상 늘릴 예정이다.
이란이 러시아 압력에 굴복할지는 미지수

이처럼 미국이 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전제로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재고할 수 있다고 한 만큼 러시아도 화해 기조를 이어가려고 한다. 실제로 러시아는 1995년 이란과 공급 계약한 사정거리 120km의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S-300 판매 보류를 적극 고려 중이라고 알려져 주목된다. 러시아는 과거에도 이란에 미사일을 판매한 전력이 있고, 그중 일부는 이스라엘과 무력 분쟁을 벌이는 팔레스타인 과격단체 하마스와 헤즈볼라에게도 넘어갔다고 알려져 미·러 관계의 악재가 돼왔다. 문제는 이미 탄도 미사일 개발과 핵개발을 추진해온 이란이 러시아의 압력을 고분고분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점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 2000km로 사하브 3호 미사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본토를 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 55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미·러 관계가 부시 행정부 때와 달리 순항을 시작한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속단은 금물이라는 반응이다. 양국이 미사일 방어 문제와 이란 문제 등에 관해 협조하기로 했지만, 해결해야 할 다른 현안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회원국을 확대하기 위해 옛 소련 일원으로 러시아 뒷마당 격인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까지 손길을 뻗치는 점도 러시아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현안에 대해 논의조차 불가능하던 부시 행정부 때와 달리 지금은 미국이나 러시아 모두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고 있어 양국 관계가 새로운 진로를 향해 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단적인 예로 러시아는 가장 염려하는 동유럽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 문제에 관해 미국이 신축적인 태도를 보일 용의를 표시한 데 대해 고무돼 있다. 반면 미국은 최대 핵심 외교현안으로 떠오른 이란의 핵개발과 탄도미사일 개발 문제에 관해 러시아의 협조를 이끌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본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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