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색, 계〉 시사회가 열리기 며칠 전, 영화를 수입한 회사 관계자를 만나 밥을 먹었다. “량차오웨이 팬들은 아주 난리 날 거야. XX까지 다 나온다니까.”

엥? 평소 거침없는 입담으로 유명한 분 답게 여자 입에서 튀어나왔다고 믿기 힘든 대략 난감한 단어들이 밥상 위를 건너왔다. 식사 시간 내내 얼마나 과감한 연출로 관객의 허를 찌르는 영화인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그러기에 모르는 게 약이다. 그날 만남 이후 〈색, 계〉하면 ‘량차오웨이 XX 나오는 영화’로 각인된 터라 보는 내내 ‘대체 언제쯤 나오려나’ 학수고대하게 되더라 이거다. 급기야 이성애자의 본분을 망각한 채 침까지 꼴깍 삼켜가며 ‘그것’의 출현을 손꼽아 기다리는 참으로 망측한 지경에 이르렀다. 장시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느라 슬슬 미간이 저려올 즈음, 에그머니, 드디어(?) 그것이 보였다!!! 그리고 두 남녀배우의 실제 정사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섹스신. 중국 정부가 30분이나 삭제하고 개봉했다는데 대체 중국 관객들은 뭘 봤을거나, 측은한 생각이 들 만큼 정말 ‘허걱’ 소리 나는 정사 연기. 과연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빛나는 영화답게 아주 ‘뜨거운’ 장면들이 즐비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 뜨거운 장면들이 하나도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참기 힘들 만큼 서늘한 냉기가 전해졌다. 량차오웨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카메라를 뚫어져라 쳐다볼 때, 그 얼굴보다 더 무표정한 혁명운동이 인간의 본능을 심판할 때, 급기야 적을 사랑한 스파이, 조국을 배반한 혁명가의 마지막 선택이 임박해올 때, 영화는 차갑고, 차갑고, 차갑고, 또 차가운 얼굴로 관객과 대면하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 말없는 뒷모습으로 돌아앉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량차오웨이의 선택을 차마 비난할 수도, 그렇다고 격려할 수도 없게 만드는 영화는, 기껏 량차오웨이 XX 보러 극장 간 관객에게조차 분명 그보다 가치 있는 세상의 진실을 엿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안 감독은 그렇게 괴물 같은 내공으로, 언뜻 흔해빠진 치정 스파이 영화를 무시 못할 역사 드라마로 바꾸어내고 있더란 말이다.

리안 감독은 〈결혼피로연〉 〈음식남녀〉를 만들 때부터 흔한 소재를 흔치 않게 받아치는 재주가 있었다. 〈와호장룡〉에서 그 텅빈 여백을 메우는 꽉 찬 슬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둘의 격정을 조롱하는 사회의 냉대를 포착하는 데 소홀함이 없던 감독이, 이번에는 발가벗은 두 남녀를 겹겹이 에워싸는 시대의 폭력을 그리는 데 열심이다. 그리고 배우의 껍질은 벗기고 인물의 알맹이는 채우는 연출. 어지간히 예민한 양반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눈치챌 수 없는 캐릭터의 떨림과 울림까지 잡아채는 감독이기에, 량차오웨이 역시 온전한 몸을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라는 확신을 가진 게 틀림없다. 그가 작심하고 선보인 악인 연기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고 싶을 만큼 훌륭하다.

짐짓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실은 인간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갈등과 욕망을 들추어내는 이 영화에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는 기꺼이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물론 관객 처지에서는 ‘인터넷 검색어 1위’라는 타이틀이 더 솔깃한 유혹이겠지만.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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