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끊은 지 12일째 접어든다. 2000년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이토록 오래 술을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길어야 사흘이었다. 남이야 코웃음을 칠지 몰라도 나로선 일생의 쾌거인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내 ‘술 끊기’란 엄밀히 말해 ‘술자리 끊기’였다. 술자리를 정면돌파하지 못하고 요리조리 도망만 쳤기 때문이다. 한 후배는 “술자리에서 아이스티만 마시면서 새벽 4시까지 버텨야 하는 것 아니에요?”라며 놀려댔다. 독해~.

좋다, 버텨보기로 했다. 지인과 함께 중국 음식점에 들렀다. 깐풍기며 류산슬 따위가 식탁에 오르내렸고, 지인은 여봐란 듯이 ‘소폭(소주+맥주)’을 만들어 마셨다. 각오는 했지만 ‘급위기’가 찾아왔다. 옆 사람이 술 마시는 광경까지야 어떻게든 참겠는데,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노오란 맥주잔이 반경 50cm 안에 놓이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게다가 저 풍성한 술안주이라니…. ‘한잔 마셔, 눈감아줄게’라고 지인이 권했으면 홀라당 넘어갈 뻔했다. 결국 안주만 꾸역꾸역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먹어댔다. 극도의 포만감이 밀려오자 음주 욕구가 사라졌다. 금주로 인한 상실감을 ‘폭식’으로 달래고 말았다.

ⓒ시사IN 한향란술을 끊자 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파스타 같은 음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입맛을 바꿔야 했다. 술이 심하게 당기는 음식-예컨대 얼큰한 탕이며, 삼겹살·생선회·닭 튀김 따위-을 멀리해야 했다. 몇 차례 ‘임상 시험’을 거쳐보니 내 경우 파스타 같은 양식 요리를 먹노라면 술 생각이 덜했다. 더러 크림 파스타처럼 기름진 음식을 대할 때는 맥주 생각이 났지만, 참을 만했다. 그 결과 술 끊은 지 12일 동안 파스타만 네 번 먹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점심 때 해장 음식만 찾아다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파스타라면 1년에 두세 차례쯤 억지로, 그것도 맥주 ‘안주’로나 먹던 음식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식탐이 많은 편이었음에도, 유독 ‘유러피안’이나 ‘아메리칸’ 스타일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이른바 ‘데커레이션’에만 치중하고 양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 브런치를 1인분에 2만~3만원씩 주고서 먹는 이들을 좀체 이해하지 못했다. 소주나 맥주 혹은 고량주의 안주가 아닌 건 내게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변했다. 파스타 맛에 단단히 빠졌다. ‘봉골레’ ‘감베로니’ ‘그랑끼오’ 같은 낯선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빠에야’ ‘삔쵸’ 같은 스페인 요리에도 차츰 눈길이 간다. 모든 음식에 저마다 깊이와 매력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된장이나 김치가 그렇듯 같은 토마토소스라 해도 집집마다, 요리법마다 천차만별이었다. 면의 종류, 하다못해 오이 피클마저 그랬다. ‘가장 중요한 건,  얼마나 다양한 음식을 접해봤느냐다’라는 미식계의 격언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역설적으로 술 ‘끊기’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 셈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음식점에 갈 생각이다.

잠의 양과 질이 달라지다

수면 습관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래 술을 마시지 않은 날에는 잠이 잘 오지 않는 편이었다. 당연히 금주 초기 일주일 정도는 밤마다 뒤척이는 일이 잦았다. 다음 날 하루 종일 피곤한 건 물론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의 양과 질이 한결 나아졌다. 전에는 하루 평균 6시간 수면을 취하고 중간에 꼭 한두 번씩 깼다. 요즘에는 하루 8시간씩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잔다. 아내가 신기해할 정도다.    
 
문제는 남는 시간의 활용이다. 아직은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뭘 해야 할지 어리둥절해할 때가 많다. 멍하니 회사에 남아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게 전부다. 근 10년 만에 획득한 ‘알코올로부터의 해방’을 어떻게 누려야 할지 목하 궁리 중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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