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주 제공이고르 로가체프 상원의원(왼쪽) 소련연방 외무 차관(한·소 수교 당시) 러시아연방 주중대사(13년8개월 재임) 러시아연방 상원의원(현재) 상하이협력기구 러시아 대표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 교수 이창주 박사(오른쪽) 러시아 외무성 외교 아카데미 석좌교수 국제 한민족재단 상임의장
이고르 로가체프 러시아연방 상원의원은 러시아의 대(對) 한반도 및 동북아 외교의 대부 격 인물이다. 그는 한국·소련 수교 당시 소련 연방의 외무차관으로서 실무 사령탑 역할을 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 특사로 평양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주석에게 수교의 배경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무려 13년에 걸쳐 주중 러시아 대사를 역임하는 동안 러시아 중국 관계를 동맹 관계로 끌어올리는 등 많은 업적을 쌓기도 했다.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 석좌교수이자 국제 한민족재단 상임의장인 이창주 교수가 최근 그를 만나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러시아 최고의 동북아 전문 외교관으로서 오늘의 동북아 정세를 어떻게 평가하나.
나는 40년 외교관 생활을 동아시아를 무대로 보냈다. 그 중에서도 한·소 수교를 이끌어내고 러시아와 중국 관계를 동맹 수준으로 격상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게 가장 자랑스럽다. 러시아와 중국이 밀착함으로써 미국의 동북아 패권 전략이 차단되어 일종의 세력균형이 이뤄졌다. 북한 핵문제에서도 이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동북아는 미국 일방의 불균형 패권 지대에서 안정적 세력균형 체제로 이행했고, 이는 21세기 세계 질서의 다극화라는 시대 흐름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 간에도 이해관계의 상충이 있고 미국이 이 공간을 활용하는 측면이어서 안정적이라기보다는 열강이 각축하는 불안정한 다자균형 관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러시아와 중국 간에도 이해 상충과 경쟁이 있다. 그러나 두 나라 관계는 보완적이고 협력적이며 반 패권적이다.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안정과 지도국가 위치에 우선 비중을 두지만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세계 정치에 연관성을 더 갖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에 위치해 전통적으로 유럽 외교를 주도했으며 세계 전쟁과 분쟁에 관여해온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중국과는 차이점이 있다. 푸틴 대통령 시대 때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이룩한 러시아가 다시 세계 정치의 균형과 평화질서에 참여하는 것은 중국이나 EU 신흥 강대국은 물론 분쟁 당사국에게도 유익하다고 본다. 특히 중국은 러시아의 이러한 국제 역할과 임무를 환영한다. 한반도 전쟁 및 무력 사용 불가능, 중동의 침략 전쟁 확대 불가능, 국제 질서의 다극화 이행 흐름 등은 러시아 강대국화 긍정적 결과일 것이다.

지난 9월30일 베이징 조어대에서 만났을 때 로슈코프 차관이 전한 베이징 6자회담 결과를 나에게 말해주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구체화되어 갈 수 있게 됐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러시아는 북한의 속내와 진실을 가장 잘 아는 국가이다. 북한 지도부는 크레믈린에 미국의 위협이 제거되고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핵을 폐기하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북한의 처지를 지지했고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해왔던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 침략 전쟁으로 국제사회의 지도력을 상실했고 중남미의 반미 전선 확대를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또 EU 통합에 따른 유럽에서의 영향력 축소와 통제력 상실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지도력 회복이 어려운 지경이다. 따라서 더 이상 동북아를 긴장 지대로 몰고 갈 수 없는 상황이다. 외교적·평화적 해결 방식 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Reuters=Newsis지난 8월17일 상하이 협력기구의 합동 군사훈련에 참석한 후진타오 중국 주석(왼쪽)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전략적 선택을 하려고 한다. 한반도 비핵화의 과정과 접점이 마련된 것이다. 고비는 있겠지만 이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돌이킬 수는 없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도 이제는 성과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렇게 볼 때 단계적 걸림돌이 되고 있는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삭제와 경제 제재 해제는 핵 폐기 목록 신고와 함께 해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과정이 지나면 평화체제 논의가 구체화할 것이다. 나는 북한 핵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은 분리될 수 없는 상관 관계에 있다고 본다.

2차 남북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 러시아의 역할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성과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과연 러시아가 모종의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러시아는 남북 정상회담을 한국 사회보다 더 지지하고 성원했다.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국제 환경 조성에 일조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평양 당국에 정상회담 지지 견해를 전달했고 국제사회에 가장 먼저 남북 정상회담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정상회담의 내용과 성과도 훌륭했다고 본다. 남북의 자주적 통일 노력,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경협의 확대 발전, 6자회담, 9·19 공동성명, 2·13 합의 이행 공동노력 등 주요 쟁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노력이 국제 관계보다 우선해야 하고 남북관계가 6자회담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견지해오고 있다. 자국의 운명을 국제 테이블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0월 정상회담은 중요한 시점에 시의 적절하게 개최되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는 남북한 모두와 정상 관계가 가능하고 영토 분쟁도 없으며 간섭을 하거나 개입할 의사도 없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확고한 지지 세력이다. 러시아는 또한 유럽과 남북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공동번영을 이룰 최고의 경협구도와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TKR TSR 프로젝트와, 에너지 개발 사업 등을 위해서는 남북 관계 발전이 필수적이다. 러시아는 북한의 산업 및 에너지 시설 복구를 추진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이 러시아와 남북한 간의 3각 경협을 활성화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북·중 관계가 심상치 않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다. 이런 상태가 갈수록 심화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기에 북한과 미국 관계가 양자 관계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중국에 의존하던 미국의 대북 채널이 직접 방식으로 전환되자, 중국은 명목상의 6자회담 의장국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북에 대한 실제 영향력이나 지도력은 갖지 못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북·중 관계를 어떻게 보나?
중국은 그동안 미국의 요구를 국제사회의 규범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 이에 동참하고 북한에도 이를 수용하도록 중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전통적 우방 관계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울러 북·미 양자 관계가 수립되면서 의장국 중국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축소됐다. 여기에는 중국 지도부의 실용주의적 대외정책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미국은 중국과 정치적으로는 타이완 문제가 걸려 있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최대 시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러시아와는 달리 반미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다. 북한은 이러한 중국 태도에 매우 감정적이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에 최대 지원국이자 교류 협력 국가이다. 정치적으로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일정 부분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앞으로는 경제적으로도 상응하는 대접을 받을지 의문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제2차 남북 정상회담 후 손을 맞잡고 포즈를 취한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위원장.
최근 중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으나 북한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핵 폐기 과정을 통해 국제 관계가 정상화되고 북미 관계가 한 계단 진전되면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러시아, 남북 경협, 북·미 관계에 따라 당연한 옵션으로 따라오는 일본의 대북 배상금과 국제사회의 지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구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북한 당국은 중국의 경제 진출에 부여하던 특혜를 거둬 들였다. 중국이 북한 경제를 지배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념 동맹관계나 절대 우방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몇 개월의 차이가 있지만 한국과 러시아 모두 정권 교체기에 있다. 한국의 경우 보수 세력이 집권하면 친미 반북 노선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대 러시아 정책도 수정될 수 있다는 예상이 가능하다. 러시아도 새로운 집권 세력이 기존의 대한반도 정책을 승계할 것인지 의문이 있다.
한국의 새 정권이 보수화 할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주성을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 개인 견해로는 어느 세력이 집권을 해도 남북간의 해빙과 균형을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러시아와의 관계도 앞서 설명한 대로 한반도의 미래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경우는 오히려 한반도와의 관계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예상되는 대선 주자들이 모두 푸틴 대통령의 정책과 방향을 신봉하고 있고, 이런 기조가 국민의 절대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기자명 이창주 (국제 한민족재단 상임의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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