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송영 선생은 이 세상 사람 모두를 음악을 아는 인간과 모르는 인간, 두 부류로 분류했는데 〈시사IN〉 편집국장은 불행하게도 후자 쪽이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음악만 들어도 행복하다는데 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래도 신중현 선생이나 비틀스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은 걸 보면 대가에게는 아무리 무딘 인간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어려서 시골에서 해가 떨어지면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라디오 연속극 듣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더라도 누이들이 열광하던 연애물에는 별로 끌린 적이 없었는데 딱 한 프로그램만은 예외였다. 지금도 성우들의 목소리가 귀에서 쟁쟁한 그 작품의 제목은 ‘저 눈밭에 사슴이’었다.
그 작품에만은 왠지 모르게 정신없이 끌려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저 유명한 김수현 선생의 데뷔작이었다. 대가의 솜씨는 ‘똘똘이의 모험’만 최고로 알던 어린 소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잠자던 연애 감각도 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 중에서는 ‘저 눈밭에 사슴이’ 못지않게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작품이 〈결혼 피로연〉(1993)과 〈음식남녀〉(1994)이다. 아직 한국 영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전이었던 그 시절에 작품성에서나 재미에서나 할리우드 영화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놓는 그 영화를 보면서 공연히 혼자 통쾌해했던 생각이 난다.
바로 그 두 영화를 만든 타이완 출신 리안 감독의 신작 〈색, 계〉가 최근 개봉했다. 화면에 두세 차례나 ‘헤어누드’가 비칠 정도로 선정성이 격렬한데도 다 보고 나면 찜찜한 구석 없이 마음이 서늘하다고 한다.
리안 감독은 기자들이 왜 영화 제목이 〈색, 계〉냐고 묻자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끓어오르는 마음은 색이고, 영화를 잘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계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결국 대선판에 뛰어들 것 같다. 자기가 몸담았던 당에서 대선 후보가 공식 선출되었는데, 그 후보가 아무래도 낙마할 위험이 있어 미리 뛰어든다는 게 고작 찾아낸 명분이다. 가뜩이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망만 뒤엉켜 흐르고 나라를 잘 운용하겠다는 마음은 부족해 보이는 선거판의 ‘색’이 한층 풍부해졌다. 화면에는 신음 소리만 질펀해 대가의 작품과는 이미 거리가 멀다.
그리고 쉿, 이건 비밀인데 삼성 구조본(현 전략기획실)에서 벌어졌던 드라마도 대여점 직행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