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 Photo10월17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으로서는 반세기만에 북한을 찾은 농득마인 서기장(앞줄 가운데)이 가져온 선물을 김정일 위원장(앞줄 오른쪽)이 감상하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화가 나긴 단단히 났나 보다. 지난 9월 자신의 중국 방문을 둘러싸고 북·중 간 비밀 교섭이 지지부진해지자, ‘중국 지도부가 경제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중국에 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10월 초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측이 (중국을 배제한) 3자 종전선언을 역제안한 것도 이런 정황 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3자 종전선언 얘기가 알려지자 베이징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이제 조선이 중국과 영영 갈라서려고 저러나’ 하는 얘기부터 격앙된 반응까지 온갖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또다른 카드를 내놨다. 지난 10월16일부터 18일까지 베트남 최고 지도자로서는 반세기 만에 북한을 방문한 농득마인 베트남 서기장과 가진 회담 자리에서다. 마인 서기장을 수행한 팜자키엠 베트남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이 10월28일자 홍콩의 시사 주간지 〈아주주간〉과 인터뷰를 한 데 따르면, 김 위원장은 마인 서기장에게 “20년에 걸친 베트남의 도이모이(革新) 정책의 성취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베트남의 귀중한 경험을 거울로 삼기 위해 베트남 측의 답방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라고 밝혔다. 북한 경제 재건의 청사진으로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정일, 중국 정부에 ‘의도적 압박’ 가해

이어서 지난 10월28일부터 2박3일 동안 김영일 북한 내각 총리가 동남아 순방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찾았다. 도이모이 정책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베트남 기획투자부에서 이례적으로 장시간에 걸쳐 이론 학습을 마친 그는 개혁·개방의 현장 답사에 나서, 마치 김 위원장 방문을 위한 사전 답사라는 느낌을 짙게 풍겼다.

도이모이를 벤치마킹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공언을 중국 지도부에 대한 ‘의도적 압박’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지난해(2006년) 1월 김 위원장은 전세계의 이목을 끌며 중국 남부의 선전-주하이-광저우를 돌았다. 전세계를 향해 북한이 중국식 개발 경험을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를 매우 드라마틱하게 전한 것이다.

장쩌민 주석이 친히 선전까지 내려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김 위원장과 굳게 포옹했고, 그와 함께 현장을 답사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지난 2000년대 초부터 북한 개발의 방향을 둘러싸고 북·중 양국의 최고 수뇌부 내에서 전개된 팽팽한 신경전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김 위원장이 생각한 북한 개발의 방향은 자력 갱생 방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웃의 대국인 중국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2년 양빈을 앞세워 하려고 했던 신의주 개발 방식이야말로 김 위원장의 이같은 의중을 반영한 것이었다.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 출신 사업가였던 양빈은 중국에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중국 자본이 아닌 유럽 자본을 끌어들여 신의주를 개발하려 했다. 양빈이 부동산 개발과 관련된 온갖 죄목을 뒤집어쓰고 중국 당국의 철퇴를 맞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신의주는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침략을 위해 개발한 군사도시였다. 지정학 면에서 신의주가 서방 세력에 넘어간다는 것을 중국 지도부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중앙통신2006년 1월 중국 남부를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이 광저우 시에 있는 ‘연중불수강공사’를 시찰하고 있다.
양빈 사건 이후 좁게는 신의주, 넓게는 북한 개발의 방향을 둘러싼 문제가 김정일 위원장과 장쩌민 주석, 그리고 후진타오 주석 사이에 뜨거운 감자처럼 대두했다. 중국 측 요구는 집요하고 완강했다. 북한이 중국의 경제 지원을 바란다면 중국식 개발 경험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식 개발 경험이란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개혁·개방 운운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곧 신의주 내지는 북한 개발을 중국에 맡기라는 위탁 개발, 또는 조차(租借)식 개발을 뜻하는 것이었다.

즉, 중국이 홍콩을 영국에 100년간 맡긴 뒤 되찾아와 그것을 기반으로 선전을 개발했듯이, 신의주를 중국에 맡기면 개발해서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발판으로 평양을 중심으로 한 경의선 연선의 도시 개발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김 위원장 처지에서는 자칫하면 북한을 중국의 ‘동북 4성’으로 편입시키라는 얘기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4년여에 걸친 팽팽한 신경전 끝에, 2006년 1월 그는 중국 남부 순방 길에 나섰다. 선전-주하이-광저우는 바로 중국이 홍콩의 조차 경험을 토대로 개발한 도시들이다. 즉 중국 지도부가 말한 조차식 개발의 현장인 것이다. 2001년 1월 김 위원장이 방문했던 상하이는 조차 개발로 힘을 축적한 중국이 자력으로 개발한 도시였다. 다시 말해 2001년 상하이에서 2006년 선전-주하이로 방문지가 바뀌었다는 것은 김 위원장이 자력 개발을 포기하고 중국식 조차 개발을 받아들이겠다는 극적인 변화를 함축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9개월이 지난 지금 김 위원장 입에서 (중국식 개발이 아닌) 베트남의 도이모이를 벤치마킹하겠다는 발언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는 곧 2006년 1월의 중국 남부 순방의 의미도, 북·중 양국 지도부 간에 공유돼 왔던 북한 개발의 청사진도 모두 위로 돌리겠다는 공개 선언이나 다를 바 없으니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선언에 그치지 않고, 그가 다시 열차를 타고 베트남 도이모이 대장정에 오르게 될 경우 펼쳐지게 될 광경을 상상해보면 이 문제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영화광답게 시나리오와 연출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도이모이 대장정은 또다시 전세계의 시선을 붙들어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국 남부 순방과 비교하며 그가 중국식이 아닌 베트남 식으로 갈아탄 배경 등이 집중적으로 거론될 수밖에 없다. 중국 지도부로서는 고통스런 체험이 될 수도 있다.

ⓒAP Photo베트남을 방문 중인 김영일 북한 총리(오른쪽)가 10월29일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생가를 찾았다.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또다시 김 위원장의 화려한 외교 이벤트 내지는 허풍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르다. 최근의 발언이나 움직임의 이면에는 사전에 미국과 교감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농득마인 베트남 서기장의 방북에 미국이 개입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이미 지난 9월 초의 북·미 제네바 회담에서 미국의 힐 차관보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에게 북이 핵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하면, 미국이 ‘베트남 모델’에 따라 북한의 경제 재건 과정을 떠맡아줄 용의가 있다고 비공개로 제안한 바 있다(〈시사IN〉 창간호. 2007년 9/25·10/2). 미국 측의 제안에 대해 북한 측은 대단히 고무되었고, 그로부터 한 달 보름 만에 베트남 모델의 산 증인이 평양을 찾은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만 해석하기는 어려운 대목인 것이다.

중국 지도부, 북한과 관계 개선 ‘시동’

1986년부터 베트남은 도이모이 정책에 따라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했지만 미국의 직·간접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고도 성장은 힘들었을 것이다. 베트남과의 관계 개선 초기에 미국은 직접 나서기보다는 한국이나 일본·EU의 경제 진출을 허용하고 세계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기구 개입을 적극 장려함으로써 베트남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불을 댕겼다. 미국은 또한 민간 교류와 외교 관계 정상화를 통해 베트남이 국제 사회에 안착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줬다.

북한 처지에서도 베트남 모델은 핵문제와 관계 개선 및 경제 활성화를 동시 병행하고, 베트남이라는 성공 모델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장에서는 이미 베트남 모델의 적용이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다. 북한 태권도단의 미국 순회 공연이나 올해 연말로 예정된 뉴욕 필 하모니 교향악단의 평양 공연 등 북·미간 민간 교류가 시작됐고, 연락사무소보다 한 단계 격이 높은 외교대표부를 상호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미 외교 관계 정상화를 위한 로드맵 작성조율도 대체로 끝났다. 또한 북·일 간에도 지난 9월 몽골에서 국교 정상화 교섭이 시작된 데 이어, 후쿠다 총리 등장 이후에 북한이 납치 문제에서 어느 정도 성의만 표시하면 대북 지원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는 일본 측의 메시지가 북한측에 전달됐다. 어떤 면에서 북한 개발의 청사진은 이미 중국 모델에서 베트남 모델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 위원장이 중국과의 관계를 아예 접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순망치한 관계로 공존공영하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 모델을 한쪽 길로 열어두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지도부가 자신의 방중과 대북 경제 지원에 좀더 통 큰 태도로 나올 것을 기대하고 촉구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 역시 지난 10월 중순의 17대 공산당 대회에서 북한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장쩌민 주석 계열이나 당 중앙 대외연락부 등의 목소리가 지도부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난 10월29일부터 중국공산당 류윈산(劉雲山) 선전부장이 17차 당대회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북한과 베트남, 라오스를 차례로 방문했다. 류 부장의 방북 팀에는 류훙차이(劉洪才) 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이 합류했는데 그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인물로 알려졌다. 당 대회 이후 첫 북·중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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