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시사IN〉과 〈한겨레 21〉.
섬뜩했다. 삼성의 해명이 그랬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에서 법무팀장을 지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 보안 계좌’를 폭로하자, 삼성은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김용철 변호사와 같은 대학을 나온 삼성 임원이 김 변호사의 양해를 얻어 개설한 차명 계좌라고 했다. 돈은 제3자의 것이라고 했다. 삼성 임원이 삼성전자 주식에 투자해 7억원이던 투자금을 50억원으로 불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차명 계좌를 튼 삼성 임원의 신분과 돈의 실소유주 공개 여부도 검토하고 있다는 친절한 설명도 더했다.

역시 머리 좋은 사람들의 집단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하지만 머리 좋은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자가당착이다. 앞뒤를 잘 맞춘 듯한 시나리오지만 삼성의 해명에는 결정적 허점이 있다.

삼성 해명대로라면 문제의 삼성 임원은 금융실명제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내부자 정보를 이용해 제3자의 돈을 굴려준 혐의가 분명하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검찰의 수사를 기다릴 일도 아니다. 삼성이 해명의 진실성을 입증하자면 먼저 이 임원을 검찰에 고발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삼성의 이런 ‘시나리오’가 너무나 잘 먹히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밝힌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만 가지고는 수사에 착수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김 변호사의 폭로가 사실일 가능성이 있겠지만, 당사자가 개인 간 차명 거래라고 딱 잡아떼면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걸핏하면 내세우는 ‘성역 없는 수사’라는 말은 이번에는 온데간데없다.

기자들 ‘삼성=불가항력’ 의식 각인

어디 검찰뿐이랴. 신정아-변양균 사건에 정력적으로 집중했던 모습들은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다. 별 진전된 내용이 없음에도 당사자와 수사 검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빠트리지 않고 중계하고 있는 전군표 국세청장 수뢰설 보도와도 대조적이다. 거의 대다수 신문과 방송, 통신이 마치 ‘보도자료’를 받아 쓰기로 작정한 것 같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를 간단히 보도하고 그것으로 끝이다.

왜 그럴까. 말할 나위 없이 삼성의 ‘힘’ 때문일 것이다. 한국 최대의 광고주 삼성의 위력이 유감없이 드러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본이 정치권력보다 더 원천적이고 근본적인 언론 자유 위협 요인이라는 점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광고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국 언론의 경영 구조가 삼성의 위력에 더 힘을 보태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KBS나 MBC 등 공영방송까지 삼성의 비리 의혹에 왜 이리 소극적인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KBS나 MBC 모두 공영방송이라지만 광고 수입 의존도가 크다. 그런 점에서는 다른 신문들과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KBS나 MBC는 기사 판단과 그 편성에서 과거와 같은 직접적 통제·검열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이들 방송 또한 전반적으로 적극적인 보도와는 거리가 멀다. 구조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삼성 X파일 보도 때 이미 확인된 바이기도 하다. 대다수 언론들이 보이고 있는 소극적인 보도의 근저에는 기자의 문제, 의식의 문제도 중층적으로 겹쳐 있음을 시사해준다. 삼성은 기자들 의식 저 밑바닥에 불가항력의 존재로 각인돼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바로 〈시사IN〉과 〈한겨레〉에서 그 희망을 확인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젊은 인터넷 신문들도 외로운 대열에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끔찍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이들마저 없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됐을까 싶기 때문이다.

 

 

기자명 백병규 (미디어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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