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일요일 아침이면 여덟 살배기 내 딸과 나는 교회를 다녀와선 꼭 드라이브를 한다(어렵디 어려운 경제 시국에 사치스럽게 드라이브라니, 좀 그렇긴 하다). 처음엔 그저 자동차 운전이 좋았던 내가 딸아이를 꼬드겨 시작한 것이었지만, 어느새 그 아이도 자동차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것에 맛이 들었는지 이젠 제가 먼저 드라이브를 나서자고 한다. 그녀와 나의 드라이브에는 빠지지 않는 게 한 가지 있는데, 그건 바로 수다다. 일단 차에 오르면 그녀는 마치 말하는 기계처럼 첫 번째 대사를 읊어 내린다. “좋다 좋다, 난 아빠랑 둘이서 드라이브하는 게 참 좋더라.” 이렇게 시작하는 그녀와 나의 대화는 일주일 동안 벌어진 일을 되새기며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드라이브를 시작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무렵 어느새 그녀와 나의 드라이브에서 점차 말이 사라지고 있었다. “난 아빠랑 둘이서 드라이브하는 게 참 좋더라” 하는 대사는 그녀가 나에게 날리는 한 번의 미소로 대체되었고, “아빠, 하늘 봐봐. 구름이 예뻐요”라던 대사는 조용히 하늘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교체되었다. 어느덧 우리들의 드라이브에는 일요일 오전 무렵의 고즈넉한 풍경과 소리 없이 흐르는 한강, 그리고 자동차와 공기가 일으키는 마찰음만 남게 되었다.   

〈월-E〉의 감성과 〈아내의 유혹〉의 속도

얼마 전 IPTV에서 애니메이션 〈월-E〉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보면서 느꼈다. 말이라곤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저놈의 폐기물 수거용 고철 로봇이 어쩜 저렇게 인상적인, 그리고 분명한 감동을 남기는가 하고 말이다. 특히 영화 전반부, 아무도 살지 않는 지구 한복판에서 월-E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쓰레기를 치우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동안 소중히 모아온 애장품들을 바라보는 와중에, 그 모든 순간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 오직 자신의 몸과 눈을 통해서만 표현한다. 특히 고놈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인류의 흔적보다 더한 감성으로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니, 이것은 과연 애니메이션 제작의 대가 픽사 스튜디오의 작품이자, 언어 없이 감동을 주조하는 고품격 영상물의 분명한 사례가 되었음을 느끼고 또 느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언어’라는 조건 하나가 달라붙는다. 그런데 그 언어라는 것은 시대마다 무게감을 달리 가져와, 어떤 시대는 언어의 시대로, 또 어떤 시대는 ‘무언어의 시대’로 분류되며 학자들의 두뇌에 파고든다. 개인적으로 2009년이 시작된 지금은, 언어가 필요 없는 이미지의 시대가 더 강력하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넓히려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최근 구속된 연쇄살인 용의자 강호순에 대해 그 얼굴을 공개하라는 국민의 요구는, 그에 관해 벌어진 어떠한 경찰 수사 내용이나 범행 기록보다도 훨씬 압도적으로 흥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시청률 40%를 넘나드는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은 또 어떤가. 여타 드라마들에 비해 평균 3, 4배의 스피드로 극을 진행시키는 〈아내의 유혹〉은 그 ‘막장스러운’ 말잔치 때문이 아니라, 방영 시간 내내 숨조차 가누지 못할 속도감 때문에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게 아니던가.

듣고 말하고 쓰는 능력보다 보고 맡고 체감할 기회가 훨씬 더 많아진다면, 앞으로 우리들의 미래를 지배할 미디어 콘텐츠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그리고 거기에 한 발짝씩 발을 담근 사람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요즘이다.

기자명 이지훈 (필름2.0 편집위원·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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