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1970년생. 지휘자가 꿈이었으나 국문학으로 우회해 지휘봉 대신 펜을 들었다. 대학 재학 중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타는 혀〉 〈파문〉 등의 저서로 ‘문학 권력’ 논쟁의 중심에 섰다.
“지금 재수생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무겁게 절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자네들은 ‘진짜 희망’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야. 건투를 비네. 자네들의 푸른 꿈을 위해.”


한 대학의 합격자 발표장에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벌써 10분 넘게 게시판을 살펴보았지만, 이름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하늘이 어두워졌고 눈이 내렸다. 한강을 건너면서 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우물쭈물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사실을 알렸다. 탄식이 꽃처럼 피어났다. 어머니는 전화기 코드를 뽑았다. 나는 누에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쉽게 재수를 결심하지는 못했다. 사실 가고자 했던 음대에 진학할 수 없어 차선으로 선택한 학과에 합격했다 해도, 대학 생활을 순조롭게 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당시에도 별로 없었다. 나는 일단 대학에 적을 둔 후 아르바이트를 해서 레슨비를 벌어 다시 음대에 진학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권유한 ‘재수의 길’

고등학교 3년 동안을 무대에서 보냈다. 굵직한 저음의 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던 남성합창단은 차치하고, 그해 가을에는 친구들과 청소년 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곡을 쓰고 가사를 짓는 데 열중했다. 학력고사 직전에도 국립극장에서 흑인영가를 부르던 소년에게 대학입시의 실패는 절망이기보다는 낯선 느낌이었다. 왜 나는 음대에 갈 수 없는 건가. 가난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난 후 아버지의 고백을 들으니, 합창단의 지휘자 선생이 아버지를 따로 만나 음대 진학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악을 ‘딴따라’로 간주했고 또 가난하기까지 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알면서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합격자 발표 다음 날, 엉뚱하게도 나는 재수생이 된 것이 아니라 총무처 9급 공무원 시험 응시 원서를 들고 지금의 방송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원서 접수를 마친 후 나는 예상문제집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아버지는 “3년 동안 딴따라로 살아온 네가 무슨 공부를 하겠냐. 공무원 시험을 쳐서 일찍 취직하는 게 낫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무슨 오기였는지 그러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건조해질 미래를 생각하면서 자못 우울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9급에서 7급까지 가려면 한 25년 걸린다는데, 비둘기호 열차처럼 철로 위의 지루한 인생 항해가 시작되겠구나 하는 예감 때문에 치를 떨었다.

ⓒ뉴시스지난해 11월13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
그러나 나는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았다. 3월 어느 날, 어머니가 재수는 어떤가 하고 권유하셨다. 그래도 장남인데, 하는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그렇게 시작된 재수 시절에 나는 모든 음악과 절교했다. 일단 대학에 가서 경제적으로 독립하자. 그러면 원하던 음대에도 갈 기회가 오겠지. 그러나 엉뚱하게도 오늘의 나는 문학 평론가가 되어 있다. 알쏭달쏭한 게 인생이다.

“오늘날 재수생들도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무겁게 절망하고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자네들은 ‘진짜 희망’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야. 아무려면 스위치백 기차도 흥미 있다네. 알쏭달쏭하겠지만 그렇게 인생은 전진한다는 거야. 건투를 비네. 자네들의 푸른 꿈을 위해. 방법적 절교의 시간을 위해. 누에의 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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