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함 평전〉신병주 지음글항아리 펴냄

기축년(己丑年) 새해를 맞는 만큼 어김없이 토정비결을 찾아보는 이들이 많을 듯싶다. 무슨 사자성어처럼 쓰이지만 ‘토정비결’은 ‘토정의 비결’이란 뜻이다. 흙으로 지은 정자를 가리키는 ‘토정(土亭)’은 알다시피 이지함(1517~1578)의 호이니 고유명사다. 〈토정비결〉은 이지함판 〈시크릿〉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 〈시크릿〉이 “수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려 한다면, 〈토정비결〉은 자력 구제가 가능하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 한 해의 운세를 일러준다. 흥미로운 건 이지함이 상식과는 다르게 〈토정비결〉의 저자가 아니라는 사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고려할 때 토정이란 이름을 빌려 썼을 거라는 얘기다. 그 이유로 저자는 이지함이 점술과 관상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 친숙한 민중 지향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을 든다.

사화(士禍)의 회오리에서 한 발짝 비켜서 처사(處士)의 삶을 살다 갔지만 이지함은 세상을 잊은 채 현실을 외면한 은둔거사가 아니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서 ‘처사형 학자’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갖고서 민생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쓴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이지함 또한 천거를 받고 1573년에 포천 현감에, 1578년에는 아산 현감에 부임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정치적 이상을 펴보고자 했다.

그의 핵심적인 사회 경제사상은 무엇이었나?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포천현의 문제를 타개하려고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그는 상·중·하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한다. 상책은 국왕이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고, 중책은 국왕을 보좌하는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이 청렴성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하책은 땅과 바다를 적극 개발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농업이 본업이던 사회에서 상업과 수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지함은 덕이 본(本)이고 재물이 말(末)이지만 본말은 상호보완적이며,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리(利)’도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대를 앞선 그의 적극적인 국부 증대책과 해상 통상론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되며, 이것은 18세기 북학파 실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이지함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벼슬을 사직했다.

〈주역〉에 따르면 변혁에는 시기와 지위와 능력이 필요하지만, 저자는 이지함의 경우 뛰어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시기를 찾지 못했고 현감이라는 지위도 이상을 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평한다. 민중을 위한 ‘토정의 비결’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까?

기자명 이현우 (문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