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체리 향기〉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연이어 개봉한 1990년대 후반. 어쩌면 시작은 대학로 동숭시네마테크에서, 아마도 몇 편은 종로 코아아트홀에서. 이름만 외우고 있어도 괜히 남 앞에서 젠체할 수 있는 이란 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주인공은 꼬마 아니면 노인. 대사는 짧은데 장면은 길고, ‘이야기랄 것도 없는 이야기’로 어느새 100분을 채우는 감독이었다. 그런 단출한 만듦새가 도리어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란 영화의 신비로운 기운에 홀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하얀 풍선〉과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도 기꺼이 보러 갔다. 참 좋았다. 거기까지는.

시적인 이란 영화, 소설 같은 이란 영화

이란 영화의 한결같은 화법에 점점 무뎌진 나. ‘시적인 이란 영화’도 좋지만 이젠 좀 ‘소설 같은 이란 영화’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 기대와 달리 그 후로도 오랫동안, 새로운 이란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 카탈로그 소개 글마다 하나도 새롭지 않은 수식어가 반복되는 것이다. 관조, 응시, 절제, 고요, 침잠, 초월…. 그때마다 나는 혼자 이렇게 한숨지었다. “이번에도 사건은 없는 거야. 또 사연만 있는 영화인 거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가 모든 걸 바꿔놓았다. 한 부부가 별거하는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법정에서 살인죄 성립 여부를 다투고 있는 흥미진진한 연출. 이 영화로 제84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이란 영화를 향한 내 오랜 편견을 단박에 무너뜨렸다. 사건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사건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입으로, 증언하고 반박하고 추궁하고 논쟁하는 그의 영화엔 팽팽한 긴장과 스릴이 가득했다.  

이어서 만든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2013), 그리고 〈세일즈맨〉 (2016) 역시 법정이 나오지 않을 때도 내내 법정 영화였으며 탐정이 나오지 않는데도 줄곧 추리극이었다. 등장인물 저마다의 비밀과 거짓말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대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망설이는 관객을 배심원석에 꽁꽁 묶어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감독이었다. 그가 이번에는 스페인을 배경으로 스페인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찍었다. 즐거운 결혼식 피로연 도중 갑자기 전기가 나가고, 곧 다시 불이 켜졌을 때 주인공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스)의 딸 이레네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상황. 이 티끌 같은 사건을 태산 같은 이야기로 불려가는 솜씨가 여전하다. 객석은 다시 배심원석이 되고 관객은 또 고민에 빠진다. 내가 덮어주고 싶은 비밀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누구의 거짓말을 용서할 것인가.

이 영화로 분명해졌다.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더 이상 이란 영화감독이 아니다. 끝내주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우리 시대의 스토리텔러’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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